대림미술관의 전시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를 아우르는 퀴어락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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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미술관의 전시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를 아우르는 퀴어락

작가 이강승이 2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약 1700권의 퀴어 관련 서적, 잡지, 논문 등의 표지를 보여준 이유.

ESQUIRE BY ESQUIRE 2020.06.02
 

이강승의 퀴어락 

 
작품 〈Covers(Queerarch)〉가 구찌 전시 〈이 공간, 그 장소 : 헤테로토피아〉 전체의 통로를 감싸고 있는 모양새다. 전시장에는 가봤는가?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있고, 입국 시 자가 격리되는 상황이라서 아직 전시장에 가보지는 못했다. 미술관의 전시 공간을 퀴어링(queering)함과 동시에 한국의 퀴어 커뮤니티의 역사에 대한 대화를 이끌어내고자 제안한 프로젝트였다. 전시장 도면을 바탕으로 큐레이터들,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전시 디자인 팀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작업을 디자인했고, 얼마 전에 전시 전경 사진을 받아 보았다. 원격으로 전시를 설치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2015년 작품인 〈Covers〉에서는 칼아츠(CalArts)의 라이브러리에서 모은 카탈로그를 전시했다. 커버에 실린 백인 남성들의 모습을 통해 유색인종과 여성의 압도적 부존재를 드러낸 셈이다. 〈Covers(Queerarch)〉 역시 같은 시리즈의 작품인가?
2015년 작업인 〈Covers〉와는 방법론과 시각적인 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같은 시리즈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간 공적인 또는 사적인 아카이브(라이브러리, 수집품, 예술 컬렉션 등)에 대한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대안적인 역사 쓰기를 제안하고 기존의 주류 역사에서 배제된 소수자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가시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Covers〉와 〈Covers(QueerArch)〉은 이러한 면에서 비슷한 맥락이 있을 것이다.
조금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Covers〉(2015)의 경우 미국의 예술 학교와 예술계가 표방하는 국제성과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학교 내의 라이브러리 컬렉션과 얼마나 상반되는지 크리틱을 해보고자 시도한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다녔던 칼아츠의 라이브러리를 선택하고, 학교가 설립된 이후 수집되고 공유된 시각 미술 카탈로그 약 2만 권 중 여성과 유색인종 작가의 책이 얼마나 되는지(약 1400권)를 시각화해본 작업이다. 하지만 내가 세운 기준, 즉 여성과 유색인종이라는 것 역시 매우 모호하고 문제적이었기 때문에 미술사에서 소수자의 기준점으로 제시되는 젠더와 인종에 대한 전제적인(arbitrary) 분류에 대해 고찰한 작업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이분법적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트렌스젠더 작가나, 혼혈 작가들의 위치는 어디인가? 1950~1960년대에 활동한 동유럽 작가들 또는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한 작가들은 유색인종 작가인가? 이런 것을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소수자 성을 지닌 커뮤니티가 처한 이중적 상황(가시화를 위해 소수자 성을 내세운 정체성의 정치학을 이용하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스스로를 주변화marginalization하게 되는) 역시 이야기하고자 했다.
〈Covers(QueerArch)〉의 경우는 조금 더 직설적이다. 퀴어락(한국퀴어아카이브)에서 지난 2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약 1700권의 퀴어 관련 서적, 잡지, 논문 등의 표지를 모두 스캔해서 벽지로 작업한 것으로, 한국 퀴어 커뮤니티의 역사, 담론의 흐름, 아카이빙에 대한 이야기를 이 표지들을 통해 시도한 것이다. 이 작업을 전시하는 대림미술관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염두에 두었고, 대중 친화적인 예술·디자인 전시를 통해 구축해온 관객층에게 한국 퀴어 커뮤니티의 존재와 역사에 대한 대화를 제안하는 작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아닌 일반적 의미로의 표지가 지니는 상징성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얘기해달라.
얼마 전 문학평론가 오혜진 씨와 책에 관해 얘기 나눈 것이 기억이 난다. 오혜진 씨는 책을 “기획자, 필자,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 노동자, 판매업자, 사서, 독자 등이 생산과 유통에 참여한 ‘집합 지성’의 산물로 바라본다”고 얘기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책 표지는 이런 ‘집합 지성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대에 따른 표지의 유행이나 변화, 타이포그래피, 시각 디자인의 추이 같은 것까지 생각할 때,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한 책들의 표지는 어떤 특정 담론의 유행이나 영향력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련 작업에 ‘Covers’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커버(cover)’ 또는 ‘커버링(covering)’이라는 단어가 지닌 퀴어 정치학 내부에서의 중의적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발간한 많은 퀴어 잡지는 표지를 노란색 갱지로 싸서 수신자에게 우편 발송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받는 사람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으로, 책 제목을 주소록이나 특징 없는 무언가로 위장하는 일도 많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뉴욕 대학교 법학 교수이자 퀴어학자인 겐지 요시노는 ‘커버링’이라는 단어를 “약자와 소수자가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을 표현하지 않는 행동 양식”이라고 제시하고, 사회가 소수자로서의 자유로운 표현을 권장하지 않기 때문에 소수자들은 끊임없이 커버링을 강요받는다고 주장했다. 커밍아웃을 할 수 없는 현실에 있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연인의 성별을 바꾸어 이야기하거나 이성애자를 연기하는 것이 예가 될 수 있겠다. 표지, 커버, 커버링이 지닌 이 같은 여러 상징적 의미가 이 작업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Covers(Queerarch)〉의 감상에 끼어드는 콘텍스트는 퀴어 잡지인 〈친구사이〉나 〈버디〉의 역사다. 이런 것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고 오준수(오창호) 님이 떠올랐다. 2018년의 〈Garden〉 전시 역시 〈Covers〉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그 연결 고리를 설명해본다면?
2018년 프로젝트 〈Garden〉에서 한국의 동성애자 인권운동가이자 작가인 오준수의 바이오그래피를 영국의 인권운동가이자 미술가인 데릭 저먼의 것과 병치한 것은, 한국의 퀴어 역사 그리고 HIV/AIDS의 역사가 하나의 동떨어진 역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일부이며, 질병과 억압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만들어낸 수많은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는 지난해 기획해 합정지구에서 전시한 〈퀴어락〉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대림미술관 전시 〈Covers(QueerArch)〉 역시 이러한 일련의 작업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주류 역사에서 삭제된 퀴어들의 보이지 않는 삶의 흔적을 커뮤니티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한국(미술)사의 편향된 관점을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동시에 비가시적인 삶과 기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Lee Kang Seung, Covers (QueerArch), 2019/2020; Untitled (Diary), 2020. Exhibition view, No Space Just a Place, Daelim Museum, Seoul (2020)

Lee Kang Seung, Covers (QueerArch), 2019/2020; Untitled (Diary), 2020. Exhibition view, No Space Just a Place, Daelim Museum, Seoul (2020)

 
Lee Kang Seung, Covers (QueerArch), 2019/2020; Untitled (Diary), 2020. Exhibition view, No Space Just a Place, Daelim Museum, Seoul (2020)

Lee Kang Seung, Covers (QueerArch), 2019/2020; Untitled (Diary), 2020. Exhibition view, No Space Just a Place, Daelim Museum, Seoul (2020)

〈Garden〉 전시 소식이 실린 매거진 〈뒤로〉 역시 잡지업계에서 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의 퀴어 커뮤니티와는 밀접한가?
2019년 합정지구에서 열렸던 비슷한 제목의 전시 〈퀴어락〉을 통해 젊은 세대의 한국 퀴어 작가들과 네트워킹을 하게 되었다. 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서울에 기반을 둔 20~30대 한국 퀴어 작가들에게 퀴어락(한국퀴어아카이브)에서 연구·조사를 수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작을 제작할 것을 제안했고,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친분도 쌓게 되었다.
〈뒤로〉를 창간한 이도진 씨나 햇빛서점 같은 컬렉티브의 활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편이다. 이 세대의 퀴어 작가, 디자이너, 운동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미 많은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다양한 통로를 통해 협업을 지속하고 싶다.
이뿐 아니라 2018년의 〈Garden〉 같은 프로젝트 역시 한국 퀴어 커뮤니티의 선배 작가들과 운동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시에 자료를 기증해주신 임근준 평론가와 인권 단체 친구사이, 그리고 한국퀴어아카이브의 연구자 루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오인환, 정은영 같은 선배 작가들도 내 작업에 관심을 갖고 조언을 해주셨다. 혼자 고립되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큰 힘이 된다.
글로벌 경험이 많지 않은 다수의 한국인, 특히 남성은 사실 ‘백인 주류 남성의 역사’라는 지배적 개념이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인 이성애자 남성뿐만 아니라 우리 대다수는 한정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다른 개인이 겪는 차별의 경험을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것을 부분적으로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인간의 공감 능력일 것이다. 또한 각 개인이 사회적으로 점유하는 위치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나 역시 아시아계 게이 남성으로서 받는 차별이 존재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생물학적 남성으로서 얻는 사회적인 이점도 분명히 있다. 그 때문에 교육 과정에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위치에 놓고 생각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 이를 통해 자신의 한정된 경험을 넘어서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백인, 남성, 헤테로, 다수 외에 ‘좁은 관점’으로 정의되는 주류의 사회적 특징을 환기하는 단어가 또 뭐가 있을까? 참고로 작가 홈페이지에서 전시 소개에 쓴 ‘콜로니얼(colonial)’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다수로 정의되는 사회적 특징을 환기하는 단어로는 ‘에이블리즘(ableism)’이 있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은 극단적인 비장애인 시점으로 디자인된 곳이 아닐까 싶다. (예술 공간을 포함해서) 작은 신체적 장애만 있어도 접근할 수 없는 공간과 제도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예로는 가족주의도 있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이성 간의 결혼이라는 제도에 따라 결합된 가족에게 주어지는 많은 혜택이 다른 형태의 가족 공동체에는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언급하신 ‘콜로니얼’이라는 말은 식민 역사를 통해 나타난 서구 중심의 역사와 지식 체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류 사회의 가치 체계와 교육을 통해 우리의 사고는 계속해서 식민화된 사고를 강요받고, 결과적으로 많은 소수자가 스스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한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내 작업과 연결해서 얘기하면, 한국 퀴어 커뮤니티 역사는 한국사의 일부로 논의되어야 한다. 지금은 한국 대학에서 퀴어 이론이나 한국의 퀴어 역사를 토론하는 수업조차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한국의 퀴어 역사, HIV/AIDS의 역사 등이 하나의 소수자 서사가 아닌 한국사의 일부로 소개되고 기록되는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 종로와 이태원의 게이 커뮤니티의 역사, 1980~1990년대의 에이즈 에피데믹(epidemic) 그리고 이에 대한 억압과 차별의 역사가 기술되는 날도 분명히 올 것이라고 믿는다.
‘Untitled’(Dairy)는 1998년 〈버디〉 사무실을 방문한 한 트랜스젠더 여성의 일기장을 다시 그린 작품이다. 이 여성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
이 여성은 1998년에 방영한 주병진의 심야 프로그램(〈주병진의 데이트라인〉으로 추정)을 통해 잡지 〈버디〉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버디〉 사무실을 찾아가 편집장 한채윤 씨에게 자신의 일기장을 기증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트랜스젠더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당한 폭력을 포함한 개인사, 유흥업소에서 일하면서 쓴 일기, 드로잉을 비롯해 많은 자료가 이 일기장 안에 들어 있다. 1980~1990년대 트랜스젠더들의 서사가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 일기장은 단순히 개인사의 기록을 넘어선 중요한 역사적 기록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일기를 어디 가면 읽을 수 있나?
이 일기장은 퀴어락(한국퀴어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서 현재는 열람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올해 초에 퀴어락의 아키비스트인 루인의 도움을 받아서 이 일기장을 모두 스캔할 수 있었고, 이를 아티스트 북 형태로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할 계획이다.
구찌 같은 패션 하우스가 다양성을 후원하는 행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기존의 현대미술 공간들을 찾는 관객들과 구찌 전시를 보러 오는 관객층은 조금 다를 것으로 본다. 현대 예술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관객층과의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작업 소개 내레이션을 맡은 K-팝 스타(가수 아이유가 전시장 안내 오디오의 내레이션을 맡았다)의 참여를 비롯해 흥미로운 기획이 포함되어 있어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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