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의 이단아, 런던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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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의 이단아, 런던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오는 5월로 개관 20주년을 맞는 런던의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예술계의 이단아에서 고작 20년 만에 현대미술의 세계적 중심에 섰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ESQUIRE BY ESQUIRE 2020.04.05
 

스          물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2003년에 선보인 〈더 웨더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 테이트 모던이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작품이다.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2003년에 선보인 〈더 웨더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 테이트 모던이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작품이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은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관으로 회자되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대우를 받은 건 아니다. 개관 당시에는 오히려 미술 비평가들의 숱한 비난을 샀다. 유서 깊은 아트 저널 〈벌링턴 매거진〉의 기록에 따르면 테이트 모던의 첫인상은 이랬다. “진부한 콘셉트와 자의성은 짜증이 날 정도고, 구조 배치도 시각적으로 조화롭지 못하다. 전체적으로 연속성이 부족한 탓에 전시장 안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기 쉽다. 그렇다고 새로운 방향이나 신선한 비전을 제시한 것도 아니요, 테마 전시실은 큐레이터의 놀이터를 목적 없이 방황하게 할 뿐이다.”
평론가들은 테이트 모던이 자리 잡은 사우스뱅크라는 칙칙한 입지도 싫어했고, 방치된 발전소 건물을 재단장한 건물 디자인(심지어 여러 요소를 그대로 살린)에도 날을 세웠다. 가장 큰 비난을 산 건 개관전의 내용이었다. 〈센추리 시티(Century City)〉는 세계 여러 도시의 예술계를 선보이는 전시였는데 비평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투의 평을 쏟아냈다. “라고스 지역에 할애한 부분은 너무 빈약해서 전시를 보고 나면 인종주의자,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 같은 나쁜 놈이 된 기분이다.” 〈가디언〉의 평이다. 가장 거센 반발은 시기가 아닌 주제로 작품을 구분했다는 점, 그리고 유럽과 미국 외 지역의 작품이 다수였다는 데에서 나왔다. 테이트 모던의 큐레이터들은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던 걸까? 아니, 그들은 반발을 충분히 예상했다고 한다. 다만 자신들의 시도가 더 공정하고 흥미롭다고 믿었을 뿐.
“우리는 진심으로 테이트 모던이 경이롭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언론이나 대중이 우리 편을 들어줄 거란 확신은 전혀 없었죠. 언론은 당연히 우리를 싫어했고 언론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15년이 걸렸죠.” 테이트 모던의 시작부터 함께해온 프랜시스 모리스 관장의 회상이다.
하지만 대중은 달랐다. 대중은 이 새로운 형식의 미술관을 즉각 받아들였다. 개관 첫해 방문객만 525만 명에 이르면서 테이트 모던은 곧장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현대미술관의 위치를 차지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런던 현대미술학회 의장을 역임한 큐레이터 에코 어션은 테이트 모던의 인기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테이트 모던의 인기 덕분에 런던에 우후죽순 신생 갤러리가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침체했던 아트 마켓이 커졌죠. 테이트 모던이 1970년대 예술 이론을 받아들여 100억 달러짜리 시장으로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는 5월이면 입장료를 받지 않는 이 커다란 유리문이 열린 지 20년이 된다. 테이트 모던은 이를 기념이라도 하듯 2019년 한 해 방문자 수 590만 명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영국 최고의 관광 명소’ 자리에서 대영박물관을 밀어낸 것이다. 세계를 통틀어 다섯 번째로 방문자가 많은 미술관이며 심지어 4위인 바티칸 미술관을 바짝 뒤쫓고 있다(호기심 많은 독자를 위해 굳이 첨언하자면, 방문객 수 1위 미술관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다). 현대미술관으로 범위를 좁히면 여전히 세계 1위다.
수치화되지 않는 측면에서도 테이트 모던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미술관이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미술계에도 흥미롭고 영향력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선보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는 중요하다. 뛰어난 작가와 컬렉터는 흥미롭고 영향력 있는 기관에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지적 갈증을 채울 수 있을뿐더러 작품의 가치도 한층 더 올라가니까. 테이트 모던은 그 어려운 과제를 달성해냈다. “테이트 모던은 예술가가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대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그건 곧 세계적인 분위기가 됐죠.” 학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쿠바 출신 아티스트 타니아 브루게라의 평이다.
그 유명한 터빈 홀(Turbine Hall)을 에워싼, 천장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콘크리트 전시실에서 브루게라가 말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정확히는 그곳을 채운 사람들의 나지막하고 잔잔한 웅성거림 속에서. 곧 있을 대형 기획전인 앤디 워홀 회고전 때문에 요즘은 스태프 사무실도 비슷한 분위기다. 사실 사무실 공간은 다소 평범해서 인쇄물, 책, 잡지 등이 널려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일반적인 도회지 사무실과 다를 바가 없다(혹은 고급 스포츠센터처럼 보이거나). 미니멀 스타일로 꾸민 리셉션 공간의 벽면에서나 그나마 미술관이라는 감흥을 느낄 수 있는데, 한쪽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하얀 종이에 빨간 잉크로.
 

일을 더 잘하려면

1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자.
2 문제를 파악하자.
3 듣는 법을 배우자.
4 질문하는 법을 배우자.
5 말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자.
6 변화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자.
7 실수를 인정하자.
8 단순 명료하게 말하자.
9 차분하자.
10 미소를 짓자.
   
곧 개관 기념일이 되면 ‘테이트 모던이 2000년 이후 어떻게 영국과 미술계를 바꿔놓았는지’를 조명하는 심층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물론 테이트 모던이 상황을 바꿨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개혁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2000년 훨씬 이전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테이트 모던 꼭대기에 설치되었던 〈스위스 라이트(Swiss Light)〉. 강풍으로 파손되어 결국 2008년에 철거되었다.

테이트 모던 꼭대기에 설치되었던 〈스위스 라이트(Swiss Light)〉. 강풍으로 파손되어 결국 2008년에 철거되었다.

 
2005년 터빈 홀에 전시된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조각 〈임뱅크먼트(Embankment, 제방)〉.

2005년 터빈 홀에 전시된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조각 〈임뱅크먼트(Embankment, 제방)〉.

첫 테이트 갤러리는 1897년 런던 핌리코에 문을 열었다. 설탕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아트 컬렉터 헨리 테이트의 기부금 8만 파운드로 시작했으며, 소장품은 대부분 영국의 근대(이를테면 빅토리아 여왕 시대) 미술품이었다. 하지만 1915년부터 외국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컬렉션이 영국과 외국의 근대 미술품으로 이원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자 컬렉션이 점점 더 방대해짐에 따라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고 1979년과 1987년에 확장 공사를 했다. 그 결과로 1988년 테이트 리버풀, 1993년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가 개관했다. 공간 부족은 어느 정도 해결된 셈. 그러나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테이트 갤러리의 관장들과 직원들이 오래된 회화와 조각에 심드렁해졌다는 것이었다.

본래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개념은 작가가 무언가를 표현하는 작품을 만들면 큐레이터가 이를 벽에 걸거나 받침대에 올려서 전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중년의 중산층이 와서 구경했고 그들의 삶은 어느 정도 풍요로워졌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이 시기에 이르러 몇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들이 작품을 만들고 관람하는 일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술의 매력이 중년의 중산층을 넘어설 수 없을까?’ ‘관람객이 작품과 좀 더 교류할 수 없을까?’ 결국 그들은 관객이 주변을 거닐거나 만져볼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해서 전시하거나 무대 공연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관객에게 설교하는 듯한 접근법 대신 관객 각자가 예술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 시도였다.
물론 그런 시도가 더러 끔찍한 결과물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기에 젊은 세대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그들은 이 시기의 새로운 움직임을 기억한 채로 예술을 공부했고 후에 테이트 갤러리의 큐레이터 같은 예술 관련 일자리를 찾았다. 사우스런던의 공립학교를 나온 모리스는 1970년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1987년 테이트 현대미술 컬렉션의 큐레이터가 됐다. “뭔가를 가르치려 하던, 권위적인 관점을 지닌 미술관 표준에 모두가 반기를 들던 때였죠. 결국 그 표준이 와해된 시기라고도 할 수 있고요.” 모리스의 회상이다. “뭔가가 달라져야 했고, 젊은 큐레이터들 사이에는 미술관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어요. 점점 늘어나는 컬렉션에 걸맞은, 또 학습하고 경험하는 과정을 바라는 관객의 욕구에 걸맞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말이죠. 테이트 갤러리에는 1980년대부터 이미 그런 생각이 팽배해 있었어요. 우리는 마스터 플랜을 세웠죠. 첫째, 모든 것을 런던에 집중시킬 수는 없다. 둘째, 관객은 작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 이상이어야 한다.”
모리스는 관객이 예술과 상호작용하기를 바랐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녀는 예술에 아무런 조예가 없는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도 열려 있는 테이트 갤러리를 구상했고, 그걸 구체화하는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분했다”고 말했다. “미술관 문턱을 처음 넘는 가족을 상상하며 들뜨곤 했어요. 그들에게는 아주 중대한 사건일 수 있잖아요. 그들이 그 순간에 아티스트의 철학에 동참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에요.”
1988년에는 테이트 갤러리에 새로운 관장이 부임했다. 보건부장관까지 지낸 어머니를 둔 닉 세로타는 1970년대 인문과학 분야의 베테랑이었고 자유주의자였으며, 무엇보다 이 흐름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아방가르드 현대미술을 선보이고 확장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20대 초반이던 1969년에 이미 회원 750명으로 이루어진 ‘테이트의 젊은 친구들(Young Friends of the Tate)’ 의장이 되었고 사우스런던에 공간을 얻어 강의, 회화 수업, 아트 쇼를 진행했다. 이벤트는 테이트 이사회가 개입해서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계속됐다.
장황한 논의를 거쳐 세로타와 이사회는 더 널찍한 부지에 테이트 갤러리를 확장한 후 컬렉션을 영국 미술과 해외 미술로 구분하기로 했다. 다만 부지를 선정하는 데에서 세로타는 도통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방식 자체를 실험하고 싶어 했으며 대중이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제시된 대안들보다 훨씬 큰 건물이 필요했다. 반면 해외의 작품 컬렉션을 분류하던 이사회는 그들의 개방성을 선보일 기회가 올 것을 감지했다. 편협한 브릿팝의 유물로 고통받는 런던에서 이런 작품을 선보인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일로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1993년, 새천년에 대비한 대대적인 건설 프로그램에 맞춰 국립복권(National Lottery)이 시작되었고, 참신한 공공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려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세로타와 테이트 이사회는 부지를 찾아 나섰다. 그들이 발견한 건 사우스뱅크에서 조용히 녹슬어가던 뱅크사이드 발전소였다. 자일스 길버트 스콧 경이 1940년대에 설계했으며 1981년에 폐쇄된 후 줄곧 방치된 건물이었다. 세로타가 알던 아티스트들은 오래된 산업용 건물에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 했다. 흥미로워서이기도 했지만 공간 자체가 작품의 진정성을 은유했기 때문이다. “종종 잊는 사실이지만 예술가는 노동자이고 예술가의 작품은 노동의 결과물이에요. 테이트 모던의 공간이 산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죠.” 폴란드 예술가 미로슬라프 발카의 설명이다. 그는 2009년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에 깊고 칠흑처럼 새까만 금속 동굴 작품 〈하우 잇 이즈(How It Is)〉를 전시하기도 했다.
 
1994년에 테이트는 국립복권기금 5000만 파운드로 뱅크사이드 건물을 매입했다. 재단장에 필요한 8300만 파운드는 개별 기부금으로 조성했다. 1997년에 들어선 토니 블레어 정권은 구노동당에서 신노동당(사회주의 강령을 포기하고 제3의 길을 주장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으로 넘어가고자 했고, 아이디어를 통해 산업 시대의 잿더미를 다시 피어나게 하는 창조 경제를 강조했다. 테이트 모던도 이 흐름에 명확히 동의했다. “가정에 전기를 공급하던 발전소에서, 도시를 이끌어갈 아이디어를 내는 미술관이 된 거죠.” 테이트 지역 재생 및 커뮤니티 파트너십 수석을 맡고 있는 도널드 히슬롭의 말이다. 큐레이터 에코 어션은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바꾼다는 발상뿐 아니라 재단장 방식도 주목할 만했다고 덧붙였다.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으로 벽돌과 대들보를 그대로 노출하고 스칸디나비아 스타일 가구를 들였죠. 테이트 모던이 주류까지 성공적으로 진출한 건 그 덕분이에요. 창의력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한 미래로의 진화였죠.”
이사회는 프로젝트 디렉터와 3명의 큐레이터를 채용하고 테이트 브리튼의 뒤편, 존 아이슬립 거리에 사무실을 얻어주었다. 예술계 시각에서 보자면 당시 런던은 오늘날과 달랐다. 런던은 거대 수도임에도 제대로 된 현대미술관을 갖추지 못한 도시였고, 상업 갤러리 몇 군데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프리즈 아트 페어도 아직 열리지 않은 시기였으니까. 데이미언 허스트나 트레이시 에민 같은 젊은 영국 아티스트 덕분에 조금씩 이목이 쏠리고 있긴 했지만 파리나 뉴욕의 아트 마켓과 비교하자면 비웃음을 살 수준이었다. “그때의 런던은 굉장히 편협했죠. 예술계에서 조금씩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긴 했지만, 동시대 아티스트 대부분은 신물 나는 브릿팝 시대의 촌스러움을 벗어던지고 싶어 했어요.” 〈프리즈〉 매거진 부편집장이었던 댄 폭스의 말이다. 현재 테이트의 총괄 전시 담당이자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근현대미술 큐레이터로 근무한 아킴 보차트흄은 “런던에서는 문학계가 압도적이었고 시각예술은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런던은 미술가가 아닌 소설가가 지식인 문화를 대변했으며 현대미술은 터너상을 둘러싼 논쟁으로 타블로이드 신문에서나 회자되는 희한한 영역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프로젝트 팀이 처음 벌인 일은 뱅크사이드 지역 예술가와의 협업이었다. 덕분에 개관 전부터 테이트 모던 소재지와 유대를 맺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한 일은 개관 초기에 선보일 몇 가지 특별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테이트 갤러리가 소장한 현대미술 컬렉션을 제대로 전시하는 것이었다.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이들이 제시한 솔루션이 테이트 모던에 오늘날의 명성을 안겼고 나아가 세계적으로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루이 부르주아의 1999년 작 〈마망(Maman)〉. 강철과 대리석을 소재로 한 조각으로, 높이는 10.2m, 무게는 3658kg에 달한다.

루이 부르주아의 1999년 작 〈마망(Maman)〉. 강철과 대리석을 소재로 한 조각으로, 높이는 10.2m, 무게는 3658kg에 달한다.

사람들은 흔히 예술 작품은 변치 않는 의미와 진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예술 작품에 대한 여론은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에 따라 좌우된다. 1930년대에 현대미술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알프레드 H. 바의 관점을 따랐다. 애비 록펠러의 간택을 받아 MoMA(뉴욕 현대미술관) 초대 관장을 지낸 그 전설적 큐레이터 말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블로 피카소 같은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론가나 컬렉터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해 보이는 데다 스타일이 자꾸 바뀌었으니까. 무엇이 영원히 남을 가치이고 무엇이 한때의 유행인지 알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바가 한 일은 표현주의, 큐비즘, 미래파 같은 다양한 사조를 정리하고 19세기 리얼리즘부터 현대 추상미술까지 예술의 진화를 보여주는 다이어그램을 만들어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다이어그램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아티스트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떻게 작업했는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갑자기 모든 것이 이해되었고 디너 파티에서 두어 문장으로 적당히 아는 체할 수도 있었다.
1936년 MoMA의 〈큐비즘과 추상 미술전(Cubism and Abstract Art〉 카탈로그 표지에 인쇄된 이 다이어그램은 미국을 돋보이게 했다. 다이어그램을 따라가다 보면 인류의 미술사가 당대의 미국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프로파간다에 골몰하던 CIA도 바의 논리를 따라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다이어그램은 미술상과 컬렉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그림이나 조각을 이해하기 쉬운 카테고리 안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발표 당시만 해도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여인들〉은 꽤나 기괴해 보이는 작품이었겠으나, 바가 ‘큐비즘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라고 명명한 이상 그 외관을 누가 신경 쓰겠는가?
바가 은퇴한 1967년에 이르러 MoMA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관이 되었다. 바는 미술관을 작품 보존 공간에서 관객이 뭔가를 배우는 곳으로 바꿨다. 전 세계 미술관이 MoMA의 방식을 따르기 시작했고, 미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가지 양식에서 다른 양식으로 매끄럽게 진화한다는 뉘앙스로 컬렉션을 전시했다. 현대미술을 일련의 ‘이즘’이라고 보는 이런 발상은 사람들의 인식에 깊이 뿌리내려서 음악이나 디자인 같은 다른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1990년대 존 아이슬립 거리의 테이트 모던 사무실에는 그런 생각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특정 양식이 그런 방식으로 발전할 수는 있겠으나, 바가 펼친 이야기는 결국 서양 백인 남성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바가 제시한 어떤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이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는 인식이 커졌다. “우리가 21세기에 어울리는 미술관을 개관할 것이며, 미술관의 표준을 재고할 기회를 잡았다는 걸 알았어요. 근본 원칙은 획일적인 미술사를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도,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거였죠. 그런 사명에 초점을 맞췄어요.” 모리스의 말이다.
그들의 사명은 바가 제시한 모델을 뒤엎는 데에 있었다. 1년 동안 거의 뜬구름 잡는 듯한 생각이 오갔고, 결국 큐레이터들은 세로타에게 새로운 작품 분류법을 제시했다. 골자는 시기를 불문하고 작품을 누드·행위·몸, 정물·오브제·일상, 역사·기억·사회, 풍경·사건·환경의 네 가지 주제로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세로타는 사소한 수정을 몇 번 거친 후 이 아이디어를 승인했다. 새로운 접근법은 컬렉션의 연대기 사이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발전소 공간도 자연스레 네 개의 메인 전시실로 나뉘었고, 관람객이 15분에서 1시간 정도 작품을 관람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네 개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면 한나절까지 걸릴 수 있을 정도였다.
  
 
테이트 모던에서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전시한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뮤럴스(Seagram Murals, 시그램 벽화)〉. 로스코의 후기 회화 중 하나다.

테이트 모던에서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전시한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뮤럴스(Seagram Murals, 시그램 벽화)〉. 로스코의 후기 회화 중 하나다.

큐레이터들이 모두 모여 어떤 작품끼리 어울리는지 정하는 데에 또 한 해가 걸렸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댄 폭스는 아트 페어 프리즈 팀이 개관 다음 날 사무실에 찾아와서 ‘깜짝 놀랐다’며 애시드 브라스 공연과 터빈 홀의 규모를 논했던 일을 기억한다. 앞서 말했듯 개관전 〈센추리 시티〉의 큐레이팅 방식과 다양성을 못마땅해하는 평론가도 있었지만 대중은 달랐다. “사람들은 우리가 작품을 모아놓은 방식에 대해 토론하고 싶어 했어요. 나름의 방식으로 분해하고 합치는 경험을 즐겼고, 클로드 모네와 리처드 롱의 작품을 함께 배치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죠. 익숙한 옛 친구와 참신한 작품을 동시에 발견할 때의 느낌을 좋아했어요.” 모리스의 말이다.
테이트 모던은 첫해 목표 관람객을 200만 명으로 잡았지만 결국 그 두 배 이상을 불러들였다. 놀란 건 테이트 모던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 닳아버린 계단을 보수하는 긴급 공사가 필요했고 물품도 부족했다. 몇 달 만에 1년 치를 소진하는 바람에 화장실 휴지 계약을 재협상해야 했다. 진짜 놀랄 일은 그 후 2년에 걸쳐 일어났다. 개관 특수라는 예측과 달리 방문객 수가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그런 농담을 하곤 했어요. ‘이 신혼여행이 언제쯤 끝날까?’ 관람객이 언제 감소할지를 묻는 거였죠. 하지만 관람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어요.” 히슬롭이 회상했다. 그리고 모리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건물 때문에 찾아온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옥상에 서면 굉장한 풍경이 펼쳐졌고, 마치 새로운 지역이 생겨난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전시실 안에서도 시간을 보낸다는 건 명확했죠. 우리도 그제야 영국인이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리고 2019년, 테이트 모던은 스스로의 접근법이 옳았음을 제대로 입증했다. MoMA가 주제에 따라 컬렉션을 재배치하고 백인 서양 남성이 아닌 작가의 작품을 더 많이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따라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미술관과 전시 계약을 하기 전에 그 미술관의 핵심을 아는 게 중요해요. 테이트 모던의 심장은 노동자의 공간인 터빈 홀이죠.” 미로슬라프 발카의 말이다.
터빈 홀은 거대한 동굴처럼 생긴 입구 겸 전시 공간이다. 테이트 모던은 수년간 이 공간의 특성에 맞는 대규모 설치 작품, 이를테면 미로슬라프 발카의 거대한 금속 상자 작품들, 아니쉬 카푸어와 세실 발몽의 트럼펫 모양 조형물 〈마르시아스(Marsyas)〉, 카르스텐 휠러의 슬라이드 〈테스트 사이트(Test Site)〉를 의뢰해 전시했고, 결국 터빈 홀은 테이트 모던 내에서 가장 유명한 공간이 되었다. 원래는 작품을 전시하기보다 건물로 들어가는 통로로 만든 곳이지만 말이다.
테이트 모던은 초창기부터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해왔으나 2003년 발표한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더 웨더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 같은 작품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정확히는 한 작품이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어 미술관이 나아갈 바를 구체화할 줄은. 엘리아손은 천장을 거울로 뒤덮고 노란 전구를 붙여 둥그런 태양처럼 보이게 한 후 공간에 수증기를 더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발표 전날 밤, 테이트 모던 직원들은 작품이 지루해 보일까 봐 걱정이었다고 했다.
방문객들은 전시장 바닥에서 빈둥거리며 포즈를 취했고, 천장 거울에 그 모습이 반사되는 걸 즐겼다. 거리낌 없이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엘리아손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관객이 눈을 들어 작품을 바라보는 광경을 상상하긴 했죠. 하지만 관객들은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고 손을 흔들었어요. 공기 주입식 카누를 가져온 사람도 있었죠. 요가 수업이나 종말론과 관련한 기묘한 시(詩) 모임이 열리기도 했고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런던을 방문했을 때는 몇 사람이 바닥에 엉켜 ‘Bush Go Home’이라는 문구를 만들기도 했어요. 거울로 읽을 수 있게끔 글자를 거꾸로 만드는 일이 꽤 어려웠다더군요. 작품이 관객의 머리와 몸을 이어주는 게 좋았어요. 그건 작가인 저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고요.”
〈더 웨더 프로젝트〉는 한 번쯤 반드시 봐야 하는 설치미술 작품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작품 속에 앉아서 세계 곳곳에서 온 이방인과 대화했다. BBC는 일주일 동안 작품 공간을 촬영해 ‘일기예보’를 전하기도 했다. 테이트 모던에 다녀간 불가리아의 한 커플은 그들의 딸에게 ‘테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전 에디터이자 테이트 임원회 의장인 라이오넬 바버의 시각에 〈더 웨더 프로젝트〉 이후 터빈 홀은 ‘새로운 종류의, 살아 있는 시민의 공간’이 되었다. “저는 35년 동안 그 동네에서 일했어요. 〈파이낸셜 타임스〉 본사가 거기 있었거든요. 덕분에 테이트 모던이 어떻게 지역사회를 바꾸는지 볼 수 있었죠.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면 돼요.” 그는 터빈 홀의 규모와 인기가 비즈니스 투자자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그 누구라도 터빈 홀에 들어서는 즉시 ‘동참하고 싶은 모험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경영자들은 복잡다단한 이슈를 헤쳐갈 대단한 아이디어를 가진 기관과 제휴하고 싶어 한다. “기술은 환경 문제를 야기하죠. 다양성, 포용, 평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압박도 있고요. 미술관이 그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아이디어를 열어준다면 업체들은 협력하고 싶어 할 겁니다. 테이트 모던은 국제적인 견해를 가진 미술관이지만 동시에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일에도 관심이 많죠. 실천으로 옮기기도 하고요.”
 
   
테이트 모던은 2014년 8월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해 2016년 2월에 마쳤다. 이 독특한 파사드에는 212종의 벽돌 33만6000개가 쓰였다.

테이트 모던은 2014년 8월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해 2016년 2월에 마쳤다. 이 독특한 파사드에는 212종의 벽돌 33만6000개가 쓰였다.

테이트 모던은 컬렉션을 계속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멤버십과 국제선정위원회를 운영해왔다. 그 성공은 라이오넬 바버의 생각을 잘 뒷받침한다. 지난 20여 년간 미술품 시장에는 거품이 가득 끼었고, 미술관이 필요한 작품을 구매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테이트 모던은 이 난관에 대응하기 위해 기프트 숍, 멤버십 공간, 디너 행사, 해외 순회 전시 등의 다양한 아이디어도 내고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백만장자 레너드 블라바트닉 같은 독지가의 기부금도 빼놓을 수 없다. 블라바트닉이 기부한 5000만 파운드는 영국 역사상 박물관에 기부한 최고액으로, 2016년 테이트 모던의 확장 자금 마련에 도움이 되었다.
다수의 거대 상업 갤러리도 테이트 모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물론 상업 갤러리가 런던에 둥지를 튼 건 1990년대부터이며 2003년에 시작한 프리즈 아트 페어의 성공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가고시안(Gagosian, 2000), 하우저&워스(Hauser & Wirth, 2003), 데이비드 즈위너(David Zwirner, 2012) 같은 세계적인 갤러리와 컬렉터가 런던을 찾은 이유는 테이트 모던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현존 작가의 작품을 판매하는 정도였던 경매업체들도 크게 활성화되었다. “테이트 모던은 갤러리 운영자와 컬렉터의 관점에 명성, 학문의 성격을 더했어요. 상업 갤러리는 컬렉터들이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 찾는, 시장이 잘 형성되어 있는 도시에 자리 잡고 싶어 하죠. 동시에 지식과 학문이 발달한 도시를 좋아하고요. 그런 도시에서는 갤러리가 전시하려는 작품에 대해 누군가 믿을 만한 칭찬을 해줄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럼 당연히 작품의 명성과 가치가 올라가겠죠. 테이트 모던은 런던을 대표해서 야망, 기풍, 미학이라는 이정표를 세웠어요. 그 이정표가 국제적이고도 현대적이기 때문에 전 세계를 향해 열린 것처럼 보였고 말이죠.” 어션의 설명이다. 1990년대 초반 미술계에서 런던은 별 볼 일 없는 그저 그런 도시였다. 메이페어와 쇼어디치에 상업 갤러리가 몇 곳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뉴욕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아트 마켓이 열리는 도시이며, 연간 미술 작품 판매액이 100억 파운드에 이른다. 어션은 단독 기관의 성과라고 하기는 어렵겠으나 테이트 모던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테이트 모던 덕분에 런던은 개방적이고 박식하며 부유한 사람이 사는 도시라는 인상을 갖게 됐죠. 그건 컬렉터와 유망 갤러리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인상이고요. 테이트 모던이 아트 마켓과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 덕분에 다른 시설들도 탄생할 수 있었어요. 뉴캐슬의 발틱 현대미술센터나 마게이트의 터너 현대미술관 같은 곳 말이죠.”
 
  
테이트 모던 관장인 프랜시스 모리스는 런던 남부 토박이로, 1987년부터 테이트 갤러리에서 일했다.

테이트 모던 관장인 프랜시스 모리스는 런던 남부 토박이로, 1987년부터 테이트 갤러리에서 일했다.

더 높은 곳을 지향하기 위해, 테이트 모던은 지금 대규모 특별전의 방향성에 골몰하고 있다. 거대 미술관은 관객 수와 인지도 유지를 위해 블록버스터급 전시를 개최해야 한다. 하지만 창조적인, 어젠다를 제시하는 공간으로 보이려면 새로운 각도와 방식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평가도 만족하고 작품을 대여해주는 컬렉터와 미술관도 지속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테니까.
새로운 종류의 미술관이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면 유명 미술가의 고루한 회고전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자평하기를, 보차트흄은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열린 마크 로스코 전시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전시는 널리 알려진 초기 회화보다는 후기 작품에 초점을 맞췄다. 보차트흄이 이끌던 팀은 로스코의 작품을 커다랗고 새하얀 방에 걸었고, 그 결과 마치 로스코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본래 작품들이 걸려 있던 테이트 브리튼의 어둡고 오붓한 공간에 대비되는 공간이었기에 그전에 작품을 본 적 있는 관람객도 새로운 눈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를 보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든 셈이죠. 그저 사람이 작품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공간 안에 사람과 작품이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는 식으로요. 미술관에 가는 건 경험을 하기 위해서지 배우러 가는 게 아니니까요.” 보차트흄의 설명이다.
때때로 테이트 모던이 유명인의 전시에 의존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보차트흄은 그런 말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무엇보다도 특별전 입장권 판매가 창출한 이윤 덕분에 상설 전시관을 무료로 운영할 수 있으니까. “만약 당신이 커다란 극장을 갖고 있다면 셰익스피어 작품은 상영을 중단할 건가요? 아니면 시대에 맞게 작품을 재해석하고 수정할 건가요? 요점은 훌륭한 작품은 다면적이기 때문에 다시 탐구하고 상연할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앤디 워홀전을 준비한다면, 그를 아웃사이더이자 이민자의 아들이었으며 동성애자이고 미국 소비지상주의의 반대자였던 작가로 바라볼 겁니다. 전시회는 하나의 질문이 되겠죠. 무엇이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워홀을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존재로 만드는지에 대한 질문요.”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테이트 모던은 존재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었다. 한 비평가는 테이트 모던을 ‘성인을 위한 앨턴 타워(영국의 테마파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터빈 홀 기획전이 지나치게 압도적이며 그 공간은 관광객이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는 장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술평론가 중에는 테이트 모던이 미술을 너무 쉽게만 제시하려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 혹은 SNS를 통해 규격화된 감상을 야기한다며 비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모리스는 이런 비난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고 했다. “우리는 좀 더 폭넓게 세계의 작품을 수집하고 역사가 간과한 아티스트를 전면에 내세우는 진지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진심이 아니며 인기에 연연한다고 얘기했죠.”
 
하지만 이런 비판은 지난 10년간 확연히 수그러들었다. 그간 테이트 모던이 선보인 프로젝트와 기획전의 방향성, 그들이 행위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부여한 중요성에 의해서. 2001년에 해외 행위 예술 차석 큐레이터 캐서린 우드를 채용한 건 본래 아티스트와 뮤지션의 컬래버레이션을 위해서였으나, 그녀는 마크 레키, 몬스터 쳇윈드 같은 일군의 젊은 아티스트가 비디오, 사운드, 회화 같은 수단을 이용해 만든 작품을 공유하기 위해 행위 예술이나 이벤트에 의존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직 미술관 안에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이런 종류의 예술을 공유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닉 세로타와 수석 큐레이터 시나 와그스태프는 그녀의 생각을 지지했고, 이는 2012년 뱅크사이드의 오래된 기름 탱크를 활용한 행위 예술 공간 탱크스(The Tanks)의 개관으로 이어졌다. 테이트 모던은 필름, 비디오, 인터랙티브 아트 및 행위 예술을 위해 영구 갤러리를 마련한 세계 최초의 미술관이 된 것이다(만약 이런 ‘새로운 조류’가 이미 지나간 유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난 몇 달 내에 주류 예술계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2019년 12월에 벌어진 행위 예술 아닌가? 뉴욕에서 활동하는 행위 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마이애미 아트 바젤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12만 달러짜리 바나나를 먹어치운 그 사건 말이다).
탱크스는 행위 예술 프로그램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캐서린 우드는 개관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적잖이 겪기도 했지만 2015년 즈음에는 뚜렷한 변화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마치 〈더 웨더 프로젝트〉가 재현된 듯한 순간도 있었다고. 터빈 홀에서 열린 댄스 워크숍에 참석한 수백 명이 같은 날 열린 ‘나이트클럽’ 세션을 위해 거대한 디스코 조명 아래에 모여들었고, 터빈 홀이 레이브 파티가 열리는 창고로 변신했던 것이다. “막판에 그들은 〈망제(Manger, 불어로 ‘먹다’라는 뜻)〉라는 심오한 무용 작품 주위에 둥글게 모여 앉았어요. 몇 명은 울기도 했죠. 프랑스 안무가 보리스 샤마츠의 〈테이트 모던이 춤 박물관이라면?(If Tate Modern was Musée de la danse?)〉의 일환이었죠. 관람객이 테이트 모던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한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어요.”
타니아 브루게라 역시 이런 움직임을 높이 평가했다. “테이트 모던은 대규모 구경거리가 될 만한 예술을 생산했어요. ‘우리는 어떻게 모두를 즐겁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변화를 꾀하면서 행위 예술을 회화나 조각만큼 진지하게 대했고, 내가 아는 한 프로그램에 행위 예술을 포함한 최초의 대형 미술관이 됐어요. 그런 시도 덕분에 세계 예술계의 흐름이 바뀌었고 테이트 모던은 아직 선두를 달리고 있죠.”
 
   
터너상 수상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마르시아스(Marsyas)〉는 터빈 홀을 위한 대규모 추상 예술 설치 작품으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전시되었다.

터너상 수상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마르시아스(Marsyas)〉는 터빈 홀을 위한 대규모 추상 예술 설치 작품으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전시되었다.

브루게라는 이제 모리스가 테이트 모던의 방향성을 ‘사회 참여 예술’ 또는 ‘관계 예술’로 트는 과정을 관찰하고 있다. 최근 가장 많이 회자되는 예술계의 움직임인 ‘관계 예술’에서 작품은 물리적인 형상이 아닌, 아티스트가 조직한 사회 상호작용에 기반한다(예를 들어 2019년 터너상 수상자 로런스 아부 함단의 작품 일부는 시리아의 세드나야 군 교도소에 억류된 사람들을 인터뷰한 작업이다). 브루게라는 테이트 모던에서 최근 의뢰받은 작품을 위해 미술관 근처에 사는 여러 사람을 모아 함께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미술관 건물 한 동의 이름을 지역 활동가이자 자원봉사자인 나탈리 벨의 이름을 따서 개명했다. 이런 작품을 어떻게 기록하고 보관할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덕분에 작품은 한층 더 흥미로워진다(브루게라는 현재 사진으로 촬영할 수 없는, 그래서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없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그의 생각에 예술은 이미지가 아닌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테이트 모던 직원들은 굉장한 지식층일 수 있다. 그리고 현대미술은 극도로 이론적이며 복잡한 형식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와 아티스트들은 놀라우리만큼 자주 지역 커뮤니티와 미술관 운영의 세부 사항을 논한다. 이를테면 라이오넬 바버는 테이트 모던 확장 공사를 관리 감독한 업체 스탠호프(Stanhope)를 극찬했다. “그 벽돌 구조물이 얼마나 복잡한지 봤어요? 구조물을 만들기 위한 노고가 상상이나 되나요?” 닉 세로타는 그들이 지역 곳곳에 만든 소공원과 쉼터를 이야기했다. 지역과의 교류는 2000년 5월, 개관식 전날 밤부터 시작됐다. 테이트 모던은 런던 택시 운전사 300명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덕분에 기사들은 관람객을 어디에 내려줘야 하는지 알게 됐다.
발카와 브루게라의 설명에 따르면 수많은 예술가가 테이트 모던의 작품 의뢰를 기다리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기술 팀의 역량이다. “테이트 모던 기술 팀과 함께라면 플랜 B가 필요 없어요. 언제나 플랜 A를 가능하게 하거든요. 아무리 말이 안 되는 프로젝트를 도모해도 기술 팀은 작가, 변호사, 프로듀서, 보안 팀과 같이 앉아서 그게 작동하도록 만들려고 애쓰죠. 〈타틀린의 속삭임 넘버 5(Tatlin’s Whisper#5)〉(2008년 작품으로 기마경찰 2명이 군중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관람객을 제어한다)을 작업할 때였어요. 말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꿈 같은 아이디어였죠. 테이트 모던과의 회의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꿈 같은 아이디어이긴 한데요, 그렇지만…’ 하고 얘기했는데, 그들은 귀 기울여 듣더니 ‘좋아요’ 하고 대답하고는 사라졌어요. 저는 조금 노력해보다 ‘안 되겠네요’라고 말하겠거니 싶었죠. 하지만 그들은 돌아와서 ‘좋아요. 우리가 해결했어요. 말을 사용할 수 있어요’라고 얘기했어요. 언제나 ‘찾아봅시다’라고 먼저 얘기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아티스트를 존중해요. 사람과의 관계를 정말 중시하죠.”
 
교사 어머니와 건축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모리스는 그리니치에서 성장했는데, 살던 동네 끄트머리에 국립해양박물관이 있었다. 그리니치 하이 거리에 있는 상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박물관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박물관을 지름길 삼아 다니면서 모리스는 유물과 예술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비 오는 날이면 박물관에 들어가서 천천히 그것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서 윌리엄 데비스의 〈넬슨의 죽음, 1805년 10월 21일(The Death of Nelson, 21 October 1805)〉에 매료되었으나, 모리스는 그게 유명한 작품인지도 몰랐다. 다만 유년기 내내 슬퍼질 때마다 혼자 박물관에 가서 데비스의 그림을 봤고 종종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테이트 모던과 가까운 동네에서 온 어떤 아이든 그저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 서서 그걸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요. 보다시피, 나는 정말 예술이 유용하다고 믿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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