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방과 마주한 건 시골로 이사한 뒤의 일이었다. 배달 음식이 없고 외식할 일도 별로 없으니 선택의 여지 없이 매 끼니를 지어 먹었다. 이사 가기 전에는 라테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했고 점심에는 회사 근처에서 몸에 해로운 음식을 허겁지겁 사 먹었고 저녁은 주로 배달시켜 먹거나 J가 만들었다. 허기는 공평하고 누구나 끼니를 걱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끼니라는 것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건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다. 유학이나 독립, 결혼, 출산, 이혼, 가족과의 이별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일생에 한 번쯤 그런 순간이 온다. 이제는 스스로를 먹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건 주방이 전에 알던 그 주방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며, 식사 한 끼 제 손으로 마련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동안 끼니를 제공해준 사람의 노고를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너무 오랫동안 무음으로 처리되었던 그 고된 노동에 한꺼번에 소급해서 미안해지는 순간. 그나저나 이번엔 좀 다른 요인이 사람들을 주방으로 내던진 모양이다. 그건 바로 왕관 모양의 바이러스.
특이하게도 나는 결혼한 뒤에 오히려 부엌일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는데, 문제는 J의 요리 실력이었다. 그가 내게 처음 만들어준 음식은 잡채였다(각오하시라, 이제 시작이다). 그는 오징엇국을 끓이고 생선을 조리고 나물을 무치더니 탕수육과 깐풍기를 튀기고 수육을 삶고 곰탕을 끓였다. 내가 먹고 싶다는 걸 죄다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두 번째 엄마를 만난 기분이었다. 신기한 건 그가 검색이나 계량을 하지 않고 가끔씩 간을 보며 뚝딱뚝딱 요리한다는 것. 어느 날 “그 양념 비율은 어떻게 아는 거야? 외운 거야?” 물었더니 그가 답했다. “예전에 먹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런 맛인 것 같아서 하나씩 넣어보는 거야. 해보면 다 알게 돼.” 어. 그래. 멋지다. 근데 좀 재수 없네?
나는 J처럼 잘 안됐다. 음식을 먹으며 여기에 뭘 넣은 걸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경험치가 없으니 떠올릴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큰 걸림돌은 우리가 둘이라는 점이었다. 맛없으면 버리고 그저 그런 맛이라면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먹어치우면 그만인데, 내가 만든 음식을 식탁에 올리는 일이 괴로웠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J가 다가오면 부르르 화가 났다. 저리 가라고, 내가 처참하게 실패하는 현장을 목격하지 말고 어서 꺼지라고 눈으로 욕지거리를 날렸다. 나는 지고 싶지 않았고 쪽팔리기 싫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요리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에 도달했다. 이제 타인에게 묻지 말자, 내 멋대로 만들자, 허락은 나의 세 치 혀에게만 구하자. 그리하여 나는 음식을 내 맘대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일단은 망치기로 했다. 망치자. 집을 불태우는 것만 빼고 무엇이든 허용하자. 넣어보고 아닌 것 같으면 다음엔 안 넣으면 된다. 뻔뻔해지면 조금씩 좋아질 거야.
‘그리하여 그녀는 꽤 괜찮은 늦깎이 요리사가 되었습니다’라는 결론이라면 좋겠지만, 내가 전할 수 있는 소식은 지난 몇 년 동안 나 때문에 수많은 식재료가 불명예스럽게 사망했다는 사실 정도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많은 일을 처음 겪었다. 오징어와 주꾸미의 내장을 손질해봤고, 닭을 발골했고, 매생이와 생굴을 만져봤다. 지지는 것과 끓이는 것의 차이를, 바락바락과 조물조물의 차이를, 잘 구워진 것과 타버린 것의 차이를 깨달았다. 무엇보다 기쁜 건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열심히 표정 관리하고 있는 J에게 더 이상 맛있느냐고 묻지 않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음식을 만들며 내가 느낀 가장 큰 희열도 그런 것이었다. 음식이나 재료를 남기지 않고 해치웠을 때의 기쁨. 그건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2000원짜리 달래 한 봉지를 사다가 깨끗하게 다듬어 속눈썹 길이로 썬 뒤 물과 간장, 참기름, 고춧가루, 통깨만 넣으면 달래장이 되고, 잡곡밥에 반숙으로 부친 달걀 두 개 얹은 뒤 달래장을 넣고 비벼 먹으면 그제야 봄이 찾아온다는 것. 남은 달래장은 큐브 치즈만 한 크기로 자른 두부 위에 얹어 야식으로 먹고, 그렇게 먹고도 버릴까 말까 고민될 만큼 자박자박 남았다면 그대로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음 날 꺼내 바삭한 김에 갓 지은 밥을 둘둘 싸서 찍어 먹으면 된다는 것. 이런 건 또 어떤가. 무 한 덩이를 샀는데, 그것이 며칠 동안 나의 냉장고에 머물며 조금씩 작아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하나의 무가 소고기뭇국 두 그릇과 어묵탕 한 냄비, 무생채 한 통, 그리고 메밀국수에 올리는 무즙으로 변신하는 모든 과정을 목격하는 일은 정말이지 짜릿하다.
무엇을 먹든 두 가지를 생각한다.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비율이 적당한지, 조리하지 않은 싱싱한 채소를 얼마나 먹었는지. 허기는 늘 다급하게 몰려오고, 나는 식사를 만들까 배달을 시킬까 나가서 사 먹을까 하는 갈등을 반복한다. 매 끼니를 만들어 먹을 순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다만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맛있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을 단순하게 조리하고 싶고, 그 종목을 조금씩 늘려가고 싶다. J가 어느 날 난감한 얼굴로, 오래 참았지만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는 표정으로 “요리는 좀 더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앞으로 부엌은 내가 맡을게”라며 나를 주방에서 내쫓지만 않는다면. 아니 그 전에 J가 내 음식에 독살당하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