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철학 공부하는 여자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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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보이스] 철학 공부하는 여자

이마루 BY 이마루 202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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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공부하는 여자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공녀〉나 〈작은 아씨들〉보다 위기철의 논리 학습 시리즈를 더 좋아했던 초등학생 때도, 틈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교양 물리학 서적을 파고들던 학창시절에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다들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야, 우주를 설명하려면 11차원이 필요할지도 모른대.” 이렇게 말하면 대체로 돌아오는 반응은 어색한 웃음이거나 짧은 감탄사 정도였다. 아니, 이게 재미가 없어? 막 질문이 샘솟지 않아?
그런 걸 신기해하기에는 발이 땅에 붙어 있는 나이였다. 그날그날의 이벤트에 반응하고 소리 지르는 청소년에게 우주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는 이것이 단순히 나이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이 이런 주제에 관심이 없었다. 인간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인간다움’인지, 우리가 알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그런 건 사는 데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나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지?’를 묻던 나에게는 절체절명의 질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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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이들은 자라서 철학을 만난다. 소크라테스와 니체가 이들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처음으로 얻는 시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답은 아주 달라서 결코 최종적인 답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또 다른 철학자들을 만나러 간다. 가장 가까운 통로는 사회탐구 과목 중 윤리와 사상이고, 조금 더 적극적인 통로는 도서관이다. 그렇게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도 만나고, 중세 신학자들도 만나고, 베이컨과 스피노자, 데카르트와 칸트도 만난다. 여기까지 들어온 아이들은 철학의 영토에 한 발을 막 걸치고 있다고 봐도 좋다. 그중에서도 더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이 철학과에 간다. 취업에 유리하지도 않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치지도 않는데도 잘개 쪼개진 쉬운 언어가 아닌 실제 철학자가 한 말을 읽기 위해서. 새로운 질문의 바다에 눈이 번쩍 뜨이는 학생도 있고, 조금 더 적극적인 학생들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철학자가 쓴 책의 원문을 강독한다. 그리고 이런 학생들이 대학원에 간다. 그러니까 철학에 관심을 갖고, 철학을 전공해서, 철학과 대학원까지 진학하는 데는 여러 개의 관문이 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장 정석적인 루트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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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관문을 통과하는 여성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인간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여학생, 도서관에서 철학책을 빌려 보는 여학생, 철학과에서 인식론을 공부하는 여학생에 대해. 친척 어른이 대학에서 뭘 배우냐고 물어보면 철학을 전공한다고 대답하는 여학생에 대해. 여자가 그런 걸 공부해서 어디다 쓰겠냐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을 겪는 일에 대해. 철학을 공부한다니 왠지 좀 어렵게 느껴진다는 소개팅 상대방을 만날 가능성에 대해. 그런 여자들에 대해.
돌이켜보건대 2010년대 중반, 철학과 학부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놀랐던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철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들도 포함된다. 수업 내용에도, 강단에 선 사람 중에도 여성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지라 이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철학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가치나 행동과는 거리가 있다는 고정관념이 퍼져 있는 듯했다. 이를테면 철학은 살림과 어울리지 않는다. 철학은 외적 꾸밈과 어울리지 않는다. 철학은 어린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것.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의 반을 여성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중 얼마나 많은 학생이 철학을 진지하게 대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전공 수업의 절반 정도를 여성이 차지한다는 사실은 가히 놀라웠다. 선생님의 자리에는 남성뿐이지만 배우는 이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시간이 흐르면 저 선생님의 자리에 여성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됐다. 비록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철학과 역사상 여성 정교수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어쩌면 조금만 기다린다면.
 
철학은 질문과 회의의 학문이다. 원래 그런 거니까 그렇게 하라는 말은 철학이라는 무기를 손에 쥔 사람에게는 무의미하다. 고정관념은 철학과 가장 반대편에 있는 무엇이다. 철학을 도구로 삼는 여성은 여성이 왜 살림을 해야 하는지, 철학이 왜 꾸밈과 어울리지 않는지 묻고 또 묻는다. 이런 여자는 얼마나 피곤할까? 확실히 맏며느릿감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질문에서 자신을 위한 답을 만들어간다. 철학 공부하는 여자, 질문하는 여자, 회의하는 여자가 더 많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간다움에 대한 새로운 답변을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답변만큼 우리는 또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김겨울 
유튜버이자 작가이자 라디오 DJ.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을 운영하며,  MBC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책의 말들〉 〈겨울의 언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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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이마루
    아트 디자이너 김려은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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