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공부하는 여자
」그런 걸 신기해하기에는 발이 땅에 붙어 있는 나이였다. 그날그날의 이벤트에 반응하고 소리 지르는 청소년에게 우주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는 이것이 단순히 나이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이 이런 주제에 관심이 없었다. 인간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인간다움’인지, 우리가 알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그런 건 사는 데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나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지?’를 묻던 나에게는 절체절명의 질문이었지만.
돌이켜보건대 2010년대 중반, 철학과 학부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놀랐던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철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들도 포함된다. 수업 내용에도, 강단에 선 사람 중에도 여성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지라 이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철학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가치나 행동과는 거리가 있다는 고정관념이 퍼져 있는 듯했다. 이를테면 철학은 살림과 어울리지 않는다. 철학은 외적 꾸밈과 어울리지 않는다. 철학은 어린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것.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의 반을 여성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중 얼마나 많은 학생이 철학을 진지하게 대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전공 수업의 절반 정도를 여성이 차지한다는 사실은 가히 놀라웠다. 선생님의 자리에는 남성뿐이지만 배우는 이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시간이 흐르면 저 선생님의 자리에 여성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됐다. 비록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철학과 역사상 여성 정교수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어쩌면 조금만 기다린다면.
철학은 질문과 회의의 학문이다. 원래 그런 거니까 그렇게 하라는 말은 철학이라는 무기를 손에 쥔 사람에게는 무의미하다. 고정관념은 철학과 가장 반대편에 있는 무엇이다. 철학을 도구로 삼는 여성은 여성이 왜 살림을 해야 하는지, 철학이 왜 꾸밈과 어울리지 않는지 묻고 또 묻는다. 이런 여자는 얼마나 피곤할까? 확실히 맏며느릿감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질문에서 자신을 위한 답을 만들어간다. 철학 공부하는 여자, 질문하는 여자, 회의하는 여자가 더 많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간다움에 대한 새로운 답변을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답변만큼 우리는 또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유튜버이자 작가이자 라디오 DJ.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을 운영하며, MBC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책의 말들〉 〈겨울의 언어〉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