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깨운 여자들! AWAKENING MOMENT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나를 일깨운 여자들! AWAKENING MOMENT

여자가 여자에게 반한다는 건, 가히 '빅뱅이론'과 맞먹을 만큼 큰 사건이다! 그간 내가 반한 여자들, 나를 일깨운 여자들에 관한 썰.

전혜진 BY 전혜진 2024.03.04
 
여자로서 여자에게 반한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사랑’은 연인의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계속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정도를 넘어 취향을 송두리째 흔들고, 미적 기준은 물론 삶의 태도마저 바꿔버리며, 궁극적으로 앞으로 발자취를 결정 지을지도 모르는, 전 우주적인 일일지도! 과장이라고? 아니다. 미심쩍은 이들을 위해 반 칠십 평생 내가 반해온 여자들이 삶 순간순간의 결정과 정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얼마나 힘이 됐는지 작지만 큰 에피소드 몇몇을 읊어보도록 하겠다.   
 
자아가 제대로 확립되기 전인 10대 무렵. 내 ‘이상향’으로 존재해 준 여성들을 먼저 떠올려볼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2000년 ‘성인식’을 부르던 박지윤의 등장이다. 노스페이스 패딩을 교복보다 자주 입던 내게 양옆이 쫙 트인 스커트를 입고, 번개 맞은 헤어스타일로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안겼다. 선정적인 가사나 단지 ‘야해 보여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다. 예쁘긴 하지만 어딘지 틀에 갇힌 것처럼 보이던 당대 여성 가수들과 비교하며 ‘관능’이라는 것의 개념을 처음으로 골똘히 생각하게 됐었으니까. 당시 어린 내가 내 나름대로 정의한 관능의 의미는 ‘날카로움’이었다. 누가 뭐라든 그냥 하는 것, 뾰족하게 안 하던 걸 하는 여자! 이후 나만의 날카로움을 찾기 위해 나는 스스로에게 집중했다. 이성으로서 어필하고 싶은 여성상을 심어준 건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10대 후반 연애와 사랑, 이성적 매력 어필에 고민이 많던 그때 ‘그녀’에게 홀딱 반한 나는 ‘여자는 예쁜 것보다 자고로 엽기적이어야 한다’는 이상하고 우스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극중 전지현은 예쁘지만 정말 웃기는 여자였다. 가끔 이상 행동을 일삼지만 그녀의 솔직함은 주체적이고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실제 배우 전지현과도 쏙 빼닮은 그녀 덕분에 대학시절 내내 긴 생머리와 분홍 카디건을 고집해 주변의 빈축을 산 건 비밀이다.  
 
비록 지금의 나는 한소희도, 전지현도, 금자 씨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한 내 마음은 한 방울씩 단단하게 응축돼 지금 내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사랑하는 나를 만들었다.
 
자존감이 흔들리던 때, 확신과 용기를 준 여자들도 있었다. 겉모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2003년. 그때까지도 나는 까무잡잡한 내 피부를 미워했다. 시대를 지배한 ‘얼짱’들과 싸이월드 속 밀가루 색 피부를 지닌 사람들이 ‘얼짱’의 기준으로 보이던 때. 미디어에서 추앙하는 것에 취약했던 나는 엄마에게 “나를 왜 이렇게 시꺼멓게 낳은 거냐”고 따지는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까만 피부색을 내 주요 특징으로 기억하고, 친구들은 ‘깜’자가 붙은 모든 단어를 내 별명으로 삼았다. 그런 피부색이 예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건 이효리 덕분이다. 핑클 활동 때도 까무잡잡한 피부 톤이었으나 핑클의 ‘코디’는 그런 특징을 가리는, 귀엽고 청순한 방향으로 꾸려졌다. 그러나 초유의 히트 곡 ‘10 Minutes’ 무대에서 구릿빛 피부와 이를 극대화하는 오렌지 브라운 헤어, 누드 톤의 립, 밀리터리 카고 바지까지 2000년대 여성의 취향을 잔뜩 뒤흔드는 모습으로 당당히 등장한 그녀! 이효리의 까만 피부는 그의 솔직하고 ‘쿨’한 매력에 힘입어 더욱 빛났다. 그와 일종의 내적인 동질감을 갖게 된 나는 성격마저 닮아갔다. 피부를 활짝 드러내기 시작했고 덕분에 옷차림도 과감해졌던 시기. 그러니 최근 〈엘르〉 인터뷰로 ‘효리 언니’와 마주했을 때 보자마자 ‘폭’ 안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제주살이 10년 차의 피부는 그때보다 한층 더 예쁘게 그을려 있었다.  
  
2005년에는 다소 삐딱한 ‘해방’의 여성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정점에는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가 있다. 한국영화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새로운 여성 캐릭터와 스타일을 선보였음은 물론, 배우 스스로 ‘산소 같은’ 이미지를 깨부수고 여성들의 ‘친절한’ 얼굴을 재정의한 사건. 내가 ‘빨강’에 이토록 열광한 적 있었던가? 친절해 보일까 봐 빨갛게 칠한 눈 화장으로 복수 길에 나서는 모습은 꼭 감옥에서 탈주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간 한국영화사에 ‘킬러’와 같은 캐릭터성 혹은 ‘팜므 파탈’로 일컬어지는 여성 캐릭터들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 전형적이지 않았나. 붉은 아이섀도와 붉은 립 또한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전술 도구인 양 그려졌지만 금자 씨의 레드는 순전히 자신을, 자신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기에 나는 그녀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대쪽 같던 생각을 변화시킨 여자도 있다. ‘헤이 모두들 안녕! 내가 누군지 아니?’ 바로 그 이하늬다. 나는 그간 ‘미인대회’라는 행사가 참 탐탁치 않았다. 수영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 채 왕관을 쓰고 싶어 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007년, 미스 유니버스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하늬의 모습은 그런 편견조차 뒤흔든 미인 그 자체였다. 그간 한국의 미인대회 참가자들 대다수가 ‘얌전하고 순종적인’ 방식으로 구축해 온 이미지를 시원한 미소와 구릿빛 피부, 탄탄한 몸으로 전복시키면서 말이다. 심지어 “코리아!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전 세계에 장구 소리를 전파한 그의 얼굴에서는 후광 마저 비치는 듯 했다. ‘저 사람이라면 진짜 미인!’이라고 미인 대회의 존재를 쿨하게 인정(?)할 만큼! 이후 ‘미인대회 출신’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영화 〈극한직업〉에서 볼살을 못생기게 털던 그의 얼굴에서 느낀 아름다움은 또 한번 생경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선을 역전시키는 여자만의 아름다움 말이다. ‘건강한 몸’에 대한 생각은 좀 더 확장돼 배우 이시영에게로 흐른다. 몸 만드는 일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이시영의 등과 배의 굴곡을 보며 처음으로 침을 ‘주르륵’ 흘렀다. 특히 〈꽃보다 남자〉에서 처음 본 모습은 내가 아는 배우 중에서도 굉장히 가녀린 체형에 가까웠는데 그러던 어느 날 울긋불긋 빨래판을 장착하는 ‘잽’을 날리다니. 그녀의 서사는 ‘액션’ 그 자체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배우 한소희다.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탓에 강력한 미모를 지닌 신예 배우의 등장을 목도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녀는 어딘지 좀 달랐다. 특히 〈부부의 세계〉로 세간의 호기심을 한 몸에 받던 시절에 보여준 의연함. 당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그녀가 과거 담배를 물고 카메라를 빤히 응시하거나, 양쪽 팔을 휘감은 타투 사진이 화제였다. 사람들은 이를 ‘논란’으로 만들고 싶었겠지만 한소희에게 타격감은 ‘제로’였다. 되려 남성 스타들이 같은 무드의 사진을 선보였을 때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는 행태에 견줘 ‘타투와 담배 사진이 여성 스타들에게만 논란이 되는 건 차별’이라는 여론을 이끌어낸, 작품 밖에서도 유의미한 담화를 만들어내는 최강의 존재감이라니! 특히 최근 방탄소년단 정국의 솔로곡 ‘Seven’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인 얼굴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간 국내 가요 뮤직비디오에서 ‘여친 룩’으로 그려진 전형적인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어딘지 창백하고 남성 주인공보다 터프하며 ‘그런지’한 모습은 K팝이 세계적 흐름을 맞은 이때, 새로운 명장면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육감적인 몸의 매력을 캐릭터성으로 창조해 낸 〈타짜〉의 정마담 김혜수,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만으로도 걸 그룹 ‘지존’ 퍼포먼스가 가능하다는 걸 알려준 소녀시대, 언제든 자신에게 주어진 ‘도전’과 ‘파격’을 끝끝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엄정화, 나이 상관없이 여성 저마다의 ‘내 안의 소녀’를 다시 꺼내 놓은 뉴진스까지. 내가 사랑해 온 여자들은 다채로운 구석을 지녔다. 비록 지금의 나는 한소희도, 전지현도, 금자 씨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한 내 마음은 한 방울씩 단단하게 응축돼 지금 내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사랑하는 나를 만들었다. 이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겐 시시하거나 ‘그래서 어쩌라고?’ 싶을 정도로 미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여성은 여성들의 등불이 된다는 것. 그러니 여성들이여, 우리 모두 오늘도 용감하게 누군가를 ‘홀딱’ 빠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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