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참으로 바보같고 부질없다는 느낌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엘르보이스] 참으로 바보같고 부질없다는 느낌

하지만 모든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기에 우리의 고민과 실천은 무엇도 부질없지 않다.

이마루 BY 이마루 2024.03.04

 참으로 바보같고 부질없다는 느낌

 
MBTI 검사를 한 게 거의 20년 전이라 내가 인프피(INFP)인지 엣티제(ESTJ)인지 잘 모르겠다. 현지 맛집 두어 개만 검색하면 여행 준비 다 한 기분이 드는 걸 보면 계획형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일이 코앞에 닥치면 계획부터 세워 움직이는 성실함이 내겐 없다. 하지만 올해 1월의 두 가지 계획만큼은 열두 달 전부터 잡혀 있었다.
 
분노의 게이지’는 한국 최초의 가정폭력 및 성폭력 전문 상담 기관인 ‘한국여성의전화’에서 2009년부터 매년 진행하는 통계 프로젝트다. 전년도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남편이나 애인 등)’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 살해 및 살인미수 사건을 분석해 집계한 다음, 3월 8일 여성의 날에 발표한다. 수천 건에 달하는 기사를 확인해 정리하는 일은 자원 활동가들이 맡고, 담당 활동가가 프로젝트 전반을 이끈다. 어떤 남자가 여성을 살해했다는 기사는 1년 내내 끊이지 않아 그 반대의 경우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밥을 안 차려줘서” “체면을 세워주지 않아서” “헤어지자고 말해서” 남자가 여자를 죽였다는 기사를 끝없이 읽다 보면 분노가 끓어오르는 한편 머릿속이 차가워진다. 첫해 자원 활동을 마치며 나는 자신과 약속했다. 이 통계가 필요 없는 날이 올 때까지 함께하기로. 그러다 보니 4년째가 됐다.
 
물론 오프라인 활동은 좀 더 허들이 높다. ‘여성단체’라는 이름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정기 후원은 일시 후원과 달리 이것저것 고려할 게 많아 미루게 된다는 것도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집에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기를 ‘쭉쭉 빨리는’ 내가 한국여성민우회 정기총회 참석을 결심한 것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기점으로 회원 가입하고 3년쯤 지난 뒤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한 회의장에서 우연히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두 여성은 동물보호단체 활동가들이었다. 동물권에 관한 신념과 여성주의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듣다 보니 어색함은 금방 사라졌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지만 함께이며, 이곳에서만큼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들 신년 모임 일정까지 조정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지난해에는 페미니즘 백래시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많은 페미니스트를 무력감에 빠뜨렸고,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들먹이고 여성 범죄 피해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한 정부, 여성가족부 대신 ‘인구부’를 창설하자는 정치권, 점점 심각해지는 여성혐오 범죄와 마주할 때마다 이놈의 세상엔 답도 희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올해 총회에서 나는 또 한 번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담당 활동가가 피, 땀, 눈물에 유머까지 더해 만든 지난해 활동 총평 PPT에는 속 터지는 소식도 많았지만, 그런 현실 앞에 멈추지 않은 페미니스트들의 반격이 담겨 있었다. “민우회는 남성혐오 조장 단체다” “양성 평등을 외치지만 편향된 생각을 가진 것”이라는 강원도의회 의원들의 발언에 항의 방문하고, 결국 전체 도의원 대상으로 성인지감수성 교육을 받도록 했다는 원주 · 춘천 지부의 활약에 박수가 쏟아졌다. 지난겨울 악성 게임 유저들이 불러일으킨 ‘집게손가락 억지 논란’에 굴복한 넥슨코리아 규탄 기자회견 이후 협박 전화와 살인 예고가 쏟아지는 바람에 업무가 마비됐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스트들의 연대가 이어졌다는 소식이 반갑기도 했다. 외롭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었음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싸워온 회원과 활동가들의 소회가 발표될 때마다 웃으면서 눈물짓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열정적 활동으로 수상한 회원이 소감으로 리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에 실린 글을 인용했을 때였다.
 
“미국 최초의 거대한 반핵운동으로 1963년의 제한적 핵실험 금지 조약이라는 중요한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평화를 위한 여성파업’ 소속의 사람이 쓴 일화를 읽은 적 있다. (중략) 어느 날 아침 비를 맞으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하고 있노라니 참으로 바보 같고 부질없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여성파업’ 소속의 여성은 말했다. 몇 년 후 그는 가장 주목받는 반핵 행동가 중 한 사람이 된 벤저민 스팍 박사가 자신의 터닝 포인트는 한 무리의 여성들이 비를 맞으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본 것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저토록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여성들이 있으니 그 문제를 좀 더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바보 같고 부질없다는 느낌, 거대한 백래시 시대를 살아가는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억눌려 있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페미니스트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도, 낙인찍혀 괴롭기만 한 이름이 되기도 한다. 어떤 여성이 민우회 SNS 계정을 팔로했다는 이유로 사이버불링을 당하고 커리어에 타격을 입는 사회에서 전진은커녕 제자리에서 버티기도 힘에 부친다. “한동안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실패했다고 선언하길 좋아했다”는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음해하고, 그것이 이미 실패했거나 효용이 없다고 끌어내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솔닛이 승리의 한 예로 든 여성참정권 투쟁만 해도 75년이 걸린 것처럼,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기에 우리의 고민과 실천은 무엇도 부질없지 않다. 그런 믿음이 흐려질 때 필요한 건 저 멀리서 나와 함께 싸워온 동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내년에도 더 많은 페미니스트를 만나고 싶다. 미리 말하자면 총회에서 제공하는 비건 김밥이 정말 맛있다.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했다. 미디어 속 여성 혐오를 추적한 〈괜찮지 않습니다〉와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을 펴냈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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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이마루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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