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주게 잘 놀고 싶은 한량들을 위한 '한량 달력' 최신판 | 에스콰이어코리아

LIFE

끝내주게 잘 놀고 싶은 한량들을 위한 '한량 달력' 최신판

놀고 놀아도 항상 더 잘 놀아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한량 고수들의 사계절 놀이법.

박세회 BY 박세회 2022.12.26
 
 

春 

봄 : 나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봄의 시제는 가정법이다. 봄은 언제나 ‘봄이 오면’이라는 시간대로부터 다가온다. 봄은 만질 수 없는 꿈처럼 오는 것이다.” 이광호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겨울의 끝자락에 서면 언제나 마음이 조급해진다. 자칫하면 꿈같은 봄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놓칠까 염려되어서다. 입춘이 지나도 아직 봄은 오지 않는다. 절기상으로는 봄이지만 아직 봄이 도착하지 않은 그 시기를 ‘봄이 오면’ 무엇을 할지 대비하며 보낸다. 봄의 시제가 언제나 가정법으로 떠오르는 이유다.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무뎌지고 차가운 바람 사이로 미세한 따뜻함이 실려올 때쯤에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남해로 간다. 이미 어딘가에 새로운 계절이 도착해 있다면 그곳은 아마도 남해일 것이다. 봄이 내가 있는 곳에 미처 도착하지 못했다면 내가 먼저 봄이 도착해 있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매화다. 이 시기 섬진강에 가면 쌀쌀한 날씨에 꽃을 피운 매화가 산을 덮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면 아직 흰 눈이 녹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또는 안개가 능선에 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화가 한창일 때 광양 매화마을에 가면 왜 그렇게 시인들이 매화를 노래할 때 꽃향기를 먼저 이야기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 시기 매화마을은 꽃향기 반 공기 반의 상태다. 섬진강으로 내려와 크고 작은 산을 휘감듯이 흐르는 느긋한 강줄기를 본다. 이 시기 섬진강에서는 강굴이 난다. 바다에서 나는 굴보다 크기가 훨씬 더 커서 한입에 먹을 수 없을 정도다. 망덕포구에 가면 벚굴을 파는 식당들이 모여 있다. 굴에 부어서 먹을 싱글몰트위스키 한 병 챙기는 걸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꽃향기만 봄의 향기인 것은 아니다. 차갑게 굳어 있던 흙을 뚫고 올라오는 노지 쑥의 강한 땅 내음 역시 봄의 향이다. 통영에, 통영으로 가야 한다. 도다리로 낸 말간 생선 국물에 이 쑥을 넣어 먹을 생각을 한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수정식당처럼 무를 넣고 복국처럼 슴슴하게 끓이는 것보다는 초록 물이 들 때까지 진하게 끓이는 한산섬식당 스타일을 좋아한다. 도다리 쑥국을 먹고 있다 보면, 봄이라는 계절을 음식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도다리 쑥국을 먹고 산책 삼아 북포루에 오른다. 적의 침입을 미리 탐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망루는 그 목적 자체가 ‘잘 보는 것’이니 전망이 좋을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 피어 있는 철쭉과 동백꽃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아늑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누각이 나온다. 여기서 보는 통영의 바다는 다도해가 겹겹이 더해진 산수화다.
봄의 절정은 벚꽃이다. 갑작스레 꽃을 다 피워내고 후회 없다는 듯이 한꺼번에 떨어진다. 4월이 되면 전국 어디에나 벚꽃이 피지만 굳이 진해까지 가볼 이유는 있다. 진해는 일제강점기 때 군항으로 쓰인 곳이다. 지금까지 전쟁의 피해를 받은 적이 없었던 덕분에 그 시절에 심어진 벚나무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군항제 시기에만 개방하는 진해기지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 주도로에는 곳곳에 거대한 아름드리 벚꽃나무들이 있다. 여좌천의 벚꽃은 도쿄 사람들이 자랑하는 나카메구로의 벚꽃이 부럽지 않다. 바닷가 도시에 가면 꼭 오래된 화상 중국집을 찾아 식사를 한다. 진해에도 그런 곳이 있다. 1949년에 문을 열었다는 원해루는 벚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20세기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손바닥보다 작은 타일들이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는 그 시대 양식의 건물이 봄의 낭만을 자극한다. 겨울은 너무 길고 봄은 너무 짧다. 꿈처럼 온 봄은 다네다 산토카의 하이쿠처럼 어느새 ‘모두 거짓말이었다며 달아나’ 버린다. 봄의 도락은 그래서 그 찰나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즐기는 일이다. 꿈처럼 달아나버리지 못하게 기다리지 않고 찾아가 즐기는 일이다. 
- 신현호(칼럼니스트)
 

 

夏 

여름: 햇빛을 피해 여름을 즐기는 법 
10여 년 전 햇빛 알레르기가 생긴 후 태양 반대편의 감각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어둡고 축축한 여름밤의 시간엔 우리가 모르던 아름다움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던지.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6월 어느 날이었다. “반딧불이를 보러 와”라는 5년 차 제주도민 친구의 부름이 계기가 됐다. 쿵쾅거리는 클럽의 대형 스피커와 화려한 조명, 생겼다 없어지는 숱한 핫 플레이스와 가오픈 공간, ‘이제는 좀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은 팝업 스토어와 요상한 이름을 단 갤러리 공간과 페어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나의 마음. 그 와중에 들려온 ‘반딧불이’란 단어는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럽고 숭고했다. 정말 그런 생명체들이 지구, 아니 제주도에 산다고? 제주공항에서 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산양큰엉곶에선 6월 한 달간 예약을 통해 반딧불이 서식지를 걸어볼 수 있다. 운이 좋다면 7월 첫째 주까지도. 그저 앞사람의 희뿌연 형체와 발자국 소리에 의지해 어두운 숲을 저벅저벅 걷는 경험은 정말 생경하고 경이로웠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질 정도. 투어 중 휴대폰을 절대 켜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도 맘에 들었다. 반딧불이는 극도로 예민한 곤충이라 휴대전화 불빛에 도망가기 때문이라는 이유까지도. 다만 저 아름다운 불빛들이 치열한 짝짓기를 위한 몸부림이라는 설명에는 어쩐지 짭조름한 슬픔이 밀려왔달까.
그 계절 제주로 떠나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한치다. “오징어와 한치를 구분할 수 있어?” 이런 미개한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다면 차를 몰고 제주시에 위치한 ‘풍어회센타’에 가보시길. 오후 4시 30분 애매한 시간부터 영업을 시작하지만, 10분이 채 안 되어 만석을 이루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누구라도 진짜의 기운을 느낄 것이다. 오직 관광객만이 집착하는 ‘현지인’ 맛집들과는 품격이 다르다. 메뉴판은 있지만 아무도 자세히 보지 않는다. 모두가 애피타이저로 ‘한치회’를 쓸어 담고, 시커먼 내장 소스를 끼얹은 찜 요리 ‘먹통한치’를 즐긴다. 아, 그 녹진한 맛과 치아가 기억하는 식감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야채밥’을 주문해 조금 남겨둔 한치회와 함께 슥슥 비벼 먹고 나서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오징어와 비슷하지만, 훨씬 야들야들하고 식감이 섬세한 한치의 맛은 초여름 제주 애월 해안도로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밤바다 수평선 오밀조밀 빛을 발하며 떠 있는 한치 배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 시간 말이다. 반딧불이를 보고 한치를 먹고 밤바다에 뜬 한치 배를 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충분히 호들갑을 떨 재주가 내겐 좀 부족하다. 인생의 낭만을 잘 아는 한량 친구 덕분에, 제주 여름 빛의 삼부작은 랄라 밀랍초 아틀리에로 이어진다. 해가 지면, 180년이나 되었다는 구옥의 돌창고에서 밀랍초들이 불을 밝힌다. ‘명상’이란 이름의 초를 하나 사 한참 동안 그 불빛을 바라본다. 녹아내린 촛농이 그 자리에 남는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는 7월, 볕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면 햇빛 알레르기 한량은 동네 수중 산책을 즐긴다. 우산을 쓰고 안양천변을 걷는다. 안양은 걷기에 최적화된 도시다. 특히 안양예술공원 구간에 접어들면 르코르뷔지에게서 사사했던 건축가 김중업의 유유산업 안양공장, 아시아 지역에 세워진 알바로 시자의 최초 건축물 안양 파빌리온, 네덜란드 건축가 스튜디오 MVRDV가 설계한 전망대가 차례로 등장한다. 여름 산책엔 이런 음악을 함께 페어링한다. 김현철의 2집 〈32℃ 여름〉, 아침(Achim)의 1집 〈아침〉, 나미, 하수빈, 박준희 등 당대 여성 뮤지션들의 숨은 명곡을 리믹스한 전용현의 ‘明洞90’(전용현의 유튜브 채널에서 들을 수 있다.). 이런 노래를 들으며 빗속을 걸으면 겉과 속 모두 촉촉하게 ‘모이스처라이징’되는 기분이랄까. 안양이 아니라도 좋다. 각자의 동네에 각자의 길이 있을 것이다.
햇빛이 주는 원죄 속에서 아주 조금 여름을 좋아하게 된 건 풍요로워지는 과일 캘린더 덕분이다. 6월, 상큼한 서머킹 사과를 시작으로 7월엔 자두, 8월엔 복숭아가 쏟아진다. 딱복이냐 물복이냐. 이것저것 다양한 품종을 먹어보며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하는 건 그 계절에 누려야 할 호사다. 백도·미백도· 장호원황도가 물복에 속하고, 경봉·월미·대월·마도카 등이 딱복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복숭아는 천중도다. 어여쁜 빛깔, 말랑말랑 탱글한 식감, 풍부한 과즙, 기분 좋은 달콤함까지, 여름 복숭아의 왕으로 불리는 품종이다. 그리고 때로는 바에서 제철 과일의 변주를 은근하게 즐기기도 한다. 논현동에 위치한 클래식 바 임바이브는 그 계절 가장 맛있는 과일로 샴페인 칵테일을 만든다. 겨울엔 석류, 가을엔 포도, 봄엔 딸기, 여름엔 복숭아. ‘벨리니’라는 이름의 여름 칵테일은 이탈리아 화가인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뇌’(1465~1470년)라는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클래식 칵테일이다. 이 칵테일은 1948년 베니스의 헤리스 바에서 처음 만들었다. 그림을 찾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늘에 옅은 분홍빛이 돈다. 임바이브는 매해 여름 프로세코 대신 샴페인과 싱그러운 백도로 만든 ‘벨리니’를 선보인다. 5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명화 속 새벽녘 오묘한 하늘과 달콤한 여름 복숭아가 입안에 함께 들어온다. 
-김아름(칼럼니스트)
 

 

秋 

가을: 그게 뭐라고 별미, 가을 강진 
노는 거야 좋지만 놀러 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건 꽤나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러니 강진쯤은 돼야 꾸역꾸역 움직일 마음이 든다. 남도의 끝자락에 자리한 강진은 한쪽에선 바다 향기가 밀려 올라오고 다른 쪽에선 산의 기운이 내려온다. 범과 고래가 만나는 곳. 범바위가 웅장하게 솟은 월출산의 자태와 바닷물길이 내륙으로 깊이 밀고 들어온 강진만의 풍경을 보자면, 알 수 없는 미적 감흥을 느끼곤 한다. 산과 바다가 만나니 풍성한 식재료에 맛깔스러운 음식 맛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무위사와 백련사 등 소박한 미감을 간직한 사찰에 오르며 동백나무, 차나무, 배롱나무를 순서대로 영접하는 환희도 강진에서나 가능한 감각이다. 강진에는 속살거리는 봄볕, 들뜬 여름 해보다는 그 열기가 슬며시 가라앉기 시작하는 가을에 가야 좋다. 그 계절이 돼야 슴슴하고 별것 없는 풍경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워진다.
강진만의 바다와 날카로운 예각으로 만나는 남포리 끝자락에는 당연하게도 큰 시장이 자리하는데, 바로 이곳에 강진의 맛집이 수두룩하다. 따로 메뉴를 고르지 않아도, 입에 착착 붙는 반찬 스무 가지가 상에 가득 오르는 백반집이 즐비하다. 그래도 이왕 남도까지 왔으니 생선 한 마리는 구경해야 기분이 좋아진다. 경상도라면 보들보들한 가자미겠지만, 전라도니까 보들보들한 병어다. 담백하고 고소한 병어의 흰 살은 양념 국물을 넉넉히 넣어 조리거나 찌기에 안성맞춤이다. 왕성식당은 병어조림에 고구마순을 가득 넣어주는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맛있다. 병어는 5월이 가장 맛있다지만, 찬 바람 불 때 제철 무를 넣어 조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자기 전에 숙소에서 맥주라도 한잔할 생각이라면(왜 아니겠는가?) 대덕닭집의 파닭을 미리 사두시길. 도착하기 20분 전에 전화로 미리 주문해두면 잘 포장된 종이 상자가 딱 기다리고 있다. 좀 전까지도 커다란 가마솥에 튀겨지고 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뜨끈뜨끈한 열기에 매콤달콤한 향이 섞여 솔솔 흘러나온다. 아낌없이 얹은 파를 살살 들추면 쫄깃한 떡튀김이 나오는데, 그 사소한 게 가을의 강진에선 뭐라고 그렇게 맛있다.
산을 보려고 꼭 산에 올라야 하는 건 아니다. 월출산은 오르기보다 바라볼 때 더욱 수려하다. 산중턱에 봉실봉실 진하게 번지는 올리브빛 나무들이 바로 차나무다. 산중턱뿐만 아니라 월출산 남단에는 넓디넓은 차밭이 형성되어 짙푸른 녹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은 오설록의 기원인 태평양녹차가 시작된 다원으로 지금도 태평양(아모레퍼시픽)의 이름으로 차밭이 형성되어 있다. 제주에도 대규모 다원을 둔 오설록의 기원이자 모태가 강진이라는 말이다. 손톱만 한 흰 꽃이 뽀얗게 피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차꽃이다.
월출산 옆에 펼쳐진 녹음 속엔 그 옛날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살았던 고택 백운동별서가 자리한다. 제자 이시헌은 차를 빚어 해마다 스승에게 보내 도리를 다했는데, 그의 아들의 아들의 몇 번째 아들인지 모를 후손까지 제다법을 이어오며 옛날 방식으로 차를 만든다. 그 적손인 이한영이 운영하는 차문화원에서 당시의 차 맛을 즐겨본다. 다산 정약용에게 보냈다는 떡차는 찻잎을 찧고 뭉쳐 엽전처럼 빚은 것으로 홍차처럼 붉은 발효차다. 그래도 나는 떡차보다 그해 가장 먼저 솟아난 어리고 순한 잎으로 빚은 백운옥판차를 마셔보라고 할 테다. 백자에 담긴 연둣빛 찻물은 겸손하고 그윽하며 유려하다. 차 맛을 보면, 어째서 옛 선비들이 차가 부족하니 더 보내달라며 걸명소(차를 구걸하는 편지)까지 써 보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강진에 왔다면, 길 따라 해남 두륜산까지 돌아보는 건 필수 코스다. 굴곡 없이 평평한 길이 심심하게 뻗어 있는데, 그 심심함이야말로 도시 사람에게 더없이 사치스러운 감각이다. 아니다. 가을엔 심심하지도 않다. 이 무렵의 두륜산엔 눈길 닿는 곳마다 단풍이 불길처럼 번져 있어 보이는 경관만으로도 심장이 일렁인다. 그 길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사 일곱 군데 중 하나인 대흥사를 지난다. 꽤 가파른 길이긴 해도 그 옛날 초의선사가 일미선다(선과 차는 하나라는 뜻)의 마음으로 차 문화를 일구었다는 일지암까지 올라야 이 절집의 이야기에 제대로 다가갈 수 있다. 어쩐지 돌아서기 섭섭하다면, 대흥사 바로 앞 숲길에 있는 유선관에서 하룻밤 쉬어가길 권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이었던 한옥의 내부를 현대식으로 개조했다. 숙박객이 원하는 시간에 즐길 수 있는 한 시간짜리 스파가 이곳의 장점이다. 인적 없는 숲 쪽으로 통창이 나 있는 욕조에 누워 가을의 숲과 찰랑찰랑한 물길을 바라보며 뜨거운 탕욕을 하고 차 한잔으로 수분을 채워주면 그보다 더한 호사가 없다. 잘 먹고 잘 걷고 잘 자는 일. 이것이 한량의 여행법이 아닐까? 이게 뭐라고 싶지만, 슴슴하고 심심한 여행이 삶을 얼마나 충만하게 해주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최예선(예술 칼럼니스트)
 

 

冬 

겨울: 도시와 만두와 능을 즐기는 법
겨울이면 왜 이렇게 하얀 음식이 먹고 싶은지 모르겠다. 깨끗하고 맑지만 춥지는 않은 하얀 음식이. 슴슴하고 담백하고 따뜻한 음식이. 일단 만두. 평양만두다. 복 사시미와 굴, 무늬오징어, 두부와 잣죽 같은 것도 스쳐 지나가지만 만두에 밀린다. 피도 속도 하얗다. 좋아한다. 12월의 만두란 11월의 만두와는 다른 것이다. 꽁꽁 싸맸던 목도리를 푸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만두의 취식이란. 만둣국보다는 접시 만두. 평양만두만을 취급하는 전문점이 아니라면 평양냉면을 파는 곳에 가야 한다.  
평양면옥과 능라도, 평가옥, 피양옥, 진미 평양냉면의 만두가 다 다르듯이 온반도 집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접시 만두와 냉면, 그리고 온반. 이렇게 세 개를 함께 먹는다. 온반을 안 파는 데서는 접시 만두와 온면을 먹는다. 만두를 애피타이저 삼아 먹다가 냉면을 먹다가 온반을 먹으면 마치 한 다리는 냉탕에, 한 다리는 온탕에 넣고 있는 것 같다. 이러고 있으면 겨울은 좋은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딤섬도 먹는다. 딤섬만 먹기는 쓸쓸하니 프로세코든 샴페인이든 ‘뽀글이’도 한잔하면 더 좋고. 소롱포를 시작으로 쇼마이, 구채교를 먹다가 창펀과 포크번을 먹게 되는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관탕교다. 맑은 국물에 커다란 딤섬 하나가 들어 있는데, 터트려 국물과 함께 먹으면 충만한 기분이 드는 기묘한 음식이다.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이런 걸 먹는 게 나의 작은 호사다. 서울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가장 좋은 때는 12월이고, 그 아름다움이란 한껏 전력 소비량을 올린 도심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나태함과 느슨함이 흐르는 불빛이랄까. 호텔 로비, 호텔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길, 백화점 주변, 규모가 있는 매장의 쇼윈도, 대형 몰의 입구 같은 데에 자본과 취향을 녹여 장식해둔 크고 작은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를 감상하는 일은 그래서 즐겁고, 쓸쓸하다. 밥 딜런의 〈크리스마스 인 더 하트〉 앨범 같은 캐럴을 들으며 걸어도 좋겠다. 괴상해서 좋고, 기이해서 독특한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귀여운 영감이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비어져 나오니까.  
1월이면 강릉에 가고 싶어진다. 언제라도 좋은 곳이지만 소나무 때문이다. 강릉은 눈이 자주 오고, 소나무에도 눈이 자주 쌓인다. 절경이다. 눈 내린 날, 소나무로 빽빽한 강릉의 허난설헌 생가터에 이어진 솔숲을 걷다가 아침마다 여기를 걷고 싶어서 주택 가격을 알아본 적도 있었다. 걷다 보면 경포호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경포호가, 오른쪽으로 가면 씨마크 호텔을 거쳐 강문해변에 이른다. 씨마크 호텔 쪽으로 걸으면 20분이 안 걸리는 짧은 길이지만 중간중간 대나무 길이나 조류 전망대 같은 게 나와서 자꾸 옆길로 새게 된다. 그래서 바다에 가서 마시려고 했던 백주와 주머니 속에 넣어 온 골무보다 작은 술잔을 꺼내 중간에 한잔했다.
강릉의 구도심인 명주동에 있는 이레맛집의 추어탕은 추어탕을 먹지 않는 내게 매일 추어탕을 먹고 싶게 했던 곳이다. 버섯과 토란대, 고사리가 듬뿍 든 추어탕이라니. 열 가지 정도 되는 정갈한 반찬이 함께 나오는 이 식당이 집 근처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곡동에 있는 본터웰빙산채오리의 오리전골은 오리 요리의 신세계다. 좀 썰렁한 리조트 건물 같은 데에 있어서 맛집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오리 아래 깔린 산나물의 채즙이 전골이 끓을수록 우러나와서 한 방울도 남길 수 없다는 각오로 국물을 퍼먹게 된다. 곤드레, 곰취, 능이버섯, 석이버섯, 목이버섯, 더덕취, 삼립국화, 나물취가 그것들이고, 하… 오리 육수에 불려진 이 나물들은 정말 진미다.    
1월의 경주도 좋다. 크고 작은 신라인들의 무덤이 완만하게 솟아 있는 대릉원을 걸으면 공간감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낀다. 경주가 아닌 이계의 혹성들 사이를 걷는 듯한. 어느 겨울, 눈으로 덮인 대릉원을 걸으면서 지금 매우 희귀한 광경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진 적이 있다. 경주는 눈이 잘 오지 않는 곳이니까. 경주에 눈이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모든 걸 제쳐놓고 대릉원으로 달려가고 싶다. 대릉원 건너편에 있는 경주원조콩국에서 찹쌀도넛과 꿀이 들어간 콩국도 먹는다면 좋겠고.
2월, 제주에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다. 중산간의 매력에 빠져 송당의 돌집에서 거의 한 달을 지냈다. 돌집은 추웠지만 장작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고, 트리하우스도 있었고, 주인의 정성이 가득한 집이었다. 서귀포에 갔다가 화사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겨울 제주의 포근함을 온전히 느꼈다. 매화를 보러 갔던 걸매생태공원에서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매화를 봤고, 주차장에서는 한라산이 보였다. 매화를 보고 한라산까지 보니 내가 이러려고 여기에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이었나. 제주도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송악산 둘레길을 걸으니 바닷바람이 불어왔는데, 춥지 않았다. 그건 봄바람이었다. 산을 내려오니 유채꽃이 피어 있었다. 아직 2월이었다. 
-한은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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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박세회
    ILLUSTRATOR 양승희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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