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듯 항해해 온 구본창의 시간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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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듯 항해해 온 구본창의 시간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망망대해에 떠 있다.

윤정훈 BY 윤정훈 2024.02.02
 
‘사과 002’(1983),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5x13cm.

‘사과 002’(1983),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5x13cm.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편지봉투도 아니다. 그저 한 장의 사진일 뿐. 어떤 사진은 피사체 너머를 상상하게 만든다. 두 사물의 생경한 조화를 보고 있으면 이를 위해 수반됐을 여러 고민과 움직임이 그려진다. 어쩌다 봉투 속에 사과가, 그것도 반으로 잘려 들어갔을까. 부치지 못한 편지일까 혹은 초대장일까. ‘사과 002’는 구본창의 1983년 습작이다. 대기업을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독일로 떠난 청년이 한국 현대사진계의 거장이 됐다는 스토리는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은 망망대해와 같았다. 사진은 기록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만연한 1980년대 한국에서 사진 예술이라는 선택지엔 어떤 보장도 부재했으니까. 패션 사진가로 활약하며 다양한 화보와 영화 포스터 등에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지만 숱한 작업의 일부였을 뿐이다. 쓰다 만 비누, 해외로 유출된 달항아리, 먼지 쌓인 벽, 엉성하게 복원된 문화재의 파편. 올해로 70세가 된 구본창은 줄곧 이런 것에 몰두해 왔다. 박제된 곤충에서 유대감을 느끼거나 줄기만 남은 담쟁이에서 별을 조우하고,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유물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그는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소설이나 영화에 버금가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3월 1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구본창의 항해〉는 결국 한 사람의 근면함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삶은 파도타기라는 말이 있듯 결국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망망대해에 떠 있다. 표류와 항해는 결국 같은 말임을 구본창은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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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윤정훈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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