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무르익은 거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DECOR

취향이 무르익은 거실

때마다 다른 목적을 안고 타인의 집에 훌쩍 뛰어드는 건축 · 디자인 분야의 프리랜스에디터 윤솔희. 그는 지금도 어떤 집에서 이건 왜 좋은지 묻고 있을지도 모른다.

윤정훈 BY 윤정훈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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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남의 집에 다녀왔다. 10월 들어서만 여덟 번째. 일러스트레이터의 작업실이었는데 컴컴한 계단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하얀 벽과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로 만든 캔버스 지지대, 그 위로 온화한 도시 풍경을 수놓은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9와 4분의 3 승강장을 막 통과한 해리 포터처럼 엔도르핀이 돌았다. 재빨리 눈을 굴려 거실과 방, 주방의 위치를 파악해 공간 구조와 크기를 가늠한 다음 서가의 책과 상자, 오브제, 테이블 위 노트북, 반쯤 열린 과자 통과 읽다 만 책을 통해 집주인의 관심사를 파악했다.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집이 있는 걸 보니 그에게서 받은 영향이 있을까, 택배 상자가 여러 개인 걸 보니 무언가 새롭게 준비하고 있군. 저 과자는 처음 보는데 뭐지, 맛있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내게 집주인은 여기에 들어온 지 꽤 됐는데 작업에 집중하고 싶어 올가을에 인테리어를 했다고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컴퓨터를 쓰는 업무공간과 캔버스 작업공간을 분리한 점, 작업공간에는 긴 형광등을 좁은 간격으로 배치해 그림자가 지는 구석이 없도록 배려한 점이 눈에 띄었다. 시간을 알차게 쓰기 위해 공간을 가꾸는 이들의 에너지는 언제 봐도 멋지다. 이처럼 나는 80년대 방문 판매원처럼 남의 집에 들어가 집주인의 오늘을 기록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이 동네에 얼마나 살았냐는 물음부터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냐는 시시콜콜한 감정선까지 약 두 시간에 걸쳐 이것저것 묻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나로 수렴된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려는 노력들. 저마다 바깥일을 마치고 향하는 원점은 결국 집이기에, 그곳에서 잘 지내면 삶도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고 있냐고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골목마다 널린 카페나 사무실이 아니라 집을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잘 살아보겠다는 개인의 바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니까. 남 눈치 볼 것 없이 저마다 살고 싶은 대로 해놓은 그곳에선 현관문 너머의 세상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삶의 생김새와 방향을 가늠할 지표로 집은 요긴하다. 특히 눈여겨보는 곳이 거실이다. 용도가 분명한 현관과 주방, 안방, 화장실과는 달리 거실의 용도는 사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바뀐다. 게다가 숨어 있지 않다. 가려져 있지도 않다. 생업이든 부업이든 취미든, 방구석에 꽁꽁 숨겨놓은 것이 결국 삐져나오는 곳이 거실이다. 일종의 영양가 높은 삶의 표본이랄까. 물론 처음에는 이런 이치를 몰라 빙 둘러 갔다. 집의 생김새가 어떻고 안방 배치가 어떻고 한참을 벽과 바닥을 두드렸다. 노선을 바꾼 계기가 있었다. 철옹성 같은 대기업 회장님 댁도 아니고 독야청청 자연인의 거처도 아닌, 서울 구기동 파리바게뜨 골목에 있는 보통의 집에서 말이다.
 
아트 토이 컬렉터의 집이었다. 부부와 딸 한 명이 살고 있었다. 대개의 스리 룸 구조가 그렇듯 거실은 현관과 부엌, 안방, 작은방을 이어주는 허브 역할을 했다. 다만 이 집의 거실은 한 걸음 나아가 가족을 연결하고 지난 세월과 오늘을 잇고 있었다. 서로가 한동안 빠졌던 책과 그림, 피규어가 당당히 거실에 놓인 모습에서, 어느 것을 가리켜도 관련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읊는 모습에서 느꼈다. 예컨대 컬렉터와 그의 딸이 좋아하는 〈토이 스토리〉의 미스터 포테이토 헤드 피규어가 각자 좋아하는 모습으로, 그 맞은편에는 이에 질세라 아내가 좋아하는 디즈니 어드벤처 시리즈가 굳건히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저희 집에는 과거형이 없어요. 모두 지금 좋아하는 것들이죠.” 인터뷰이의 말을 듣고 문득 다른 집이 떠올랐다. 2018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남편 동료에게 저녁 식사를 초대받아 그의 집에 갔을 때다. 거실 한쪽의 목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까지 오는 높이였고, 작은 열쇠 구멍이 달린 여닫이문 형식이기에 수납장으로 추정했다. 눈으로 더듬는 내 모습을 봤는지 갑자기 집주인 얼굴에 생기가 돌더니 “소개해 드릴까요?”라며 다가왔다. 열쇠를 돌려 문을 열자 평범한 수납 선반이 보였고, 그 선반을 뒤로 젖히자 술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 금주령이 있던 시절에 술을 숨겨놓고 몰래 즐겼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내 옆에 있던 그의 아들도 이 가구를 물려받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빠도 여기에 술을 보관하고 한 잔씩 드셨어. 아트 토이 컬렉터의 집에서 그 순간이 오버랩된 건 거실은 내가 좋아하고 우리가 아끼는 이야기를 함께 키워나가는 장소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호모나랜스(Homo narrans). 사람은 본디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거실은 인간의 본능을 키우기에 가장 최적화된 곳이다. 그래서 누구네 집을 갈 때마다 거실 이쪽저쪽을 서성인다. 푸석푸석하던 우리 집 거실에 인스타그램에 저장만 하던 파랑 책장과 목각 고래 모빌, 튤립 다이닝 테이블 등이 들어온 것도 그쯤이다. 건축을 배우고 공예와 디자인 전문가에게 귀동냥하며 마음이 설레었던 것을 이제야 모으고 있다. 자랑스럽게 펼칠 만큼 내 취향이 완숙되지 않았고, 모아놓은 것들은 당분간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음을 이젠 안다. 남과의 비교라는 허물에서 벗어나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들 덕분이다. 나는 남의 집에서 내가 잘 사는 법을 배운다.
 
윤솔희
때마다 다른 목적을 안고 타인의 집에 훌쩍 뛰어드는 건축 · 디자인 분야의 프리랜스에디터. 지금도 어떤 집에서 이건 왜 좋은지 묻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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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윤정훈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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