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황효진 작가가 뜻밖에도 초등학생의 말에 위안을 얻은 이유

복잡하면서도 풍성한 초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비밀의 언덕〉

복잡하면서도 풍성한 초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비밀의 언덕〉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작가로서 종종 강연을 한다. 그중 시작 전부터 ‘이 강연은 별로 성공적이지 않겠다’는 느낌이 올 때가 가끔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주제가 좀 두루뭉술할 때, 강연 시간대가 애매할 때, 날씨가 너무 좋거나 너무 궂은 날 강연이 진행될 때, 그리고 강연의 주요 참석자가 청소년일 때. 청소년들이 흥미를 가지기에 일단 나는 그들보다 나이가 너무 많은 어른인 데다가 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보통 강연에 자발적으로 참석하기보다 부모님이 신청해서, 학교에서 잡아놓은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오곤 한다. 한 마디로 강연 대상이 청소년일 때 ‘성공하기 어렵겠다’는 예감이 드는 건 근본적으로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 또는 다른 어른들의 문제인 것이다.
 
청소년기에 갖는 다양한 고민에 관한 책 〈어른이 되면 고민이 끝날까?〉를 내고 청소년 앞에서 강연할 기회가 올해 초에도 몇 번 있었다. 날씨가 아주 좋았던 토요일의 이른 아침, 파주의 한 도서관에서 진행한 강연에는 사전 신청 인원의 절반 정도가 참석했다. 강연자로서 약간 힘이 빠졌으나 아무튼 강연은 무사히, 즐겁게 마쳤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 안산의 한 도서관에서 강연하기로 했다.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참석한다면 최선을 다해 그 시간을 꾸려나가야 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이지만, ‘오늘도 사람이 많이 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에 강연 시작 전부터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연장에 들어서자 성인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각각 중학생 딸, 고등학생 딸, 어머님으로 추정되는 세 사람이 급하게 강연장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청소년 대상 강연에 부모님이 동행하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기에 그날은 더욱 그랬다. 자리에 부모님이 있다면 청소년 독자들이 과연 마음 놓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오늘도 힘든 시간이 될 수 있겠군. 마음속으로 그런 각오를 하며 강연을 막 시작하려 할 때쯤 어린이 한 명이 뛰어들어왔다. 사서 선생님이 어린이에게 물었다. “친구,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이 강연에는 직접 신청해서 온 거예요?” 어린이는 자신은 초등학교 3학년이며,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강연을 직접 신청해서 왔다고 알려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덜컥 걱정이 됐다. 저 어린이가 이 강연을 잘 따라올 수 있을까? 혹시라도 집중을 못해서 강연 분위기를 좋지 않게 만들면 어쩌지? 근심 속에 강연을 시작했다.
 
〈어른이 되면 고민이 끝날까?〉는 고민에 관한 책이자, 내 취약함을 드러내는 용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으로 강연할 때면 참석자들에게 ‘나의 고민’을 써보고, 다른 사람들과 그 고민을 돌려 읽으며 포스트잇에 코멘트를 써서 서로 나누게끔 한다. 의외로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내 고민을 털어놓는 데 용감해질 수 있다는 걸 알아서다. 그날은 나도 최초로 고민을 썼다. “저는 책도 쓰고 회사도 운영하는데요,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가끔 불안할 때가 있어요. 하나의 일을 똑바로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글을 더 열심히 써서 더 좋은 작가, 더 유명한 작가가 돼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참석자들이 내 글을 돌려 읽는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글이 한 바퀴 돌아 내게 돌아왔을 때, 종이에는 총 여섯 장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그래도 뭔가를 실행한다는 게 대단한 용기인 것 같아요. 응원합니다.” “저는 한 직장에 오랫동안 다녔던 터라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이런 불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아예 몰랐어요. 오히려 저는 제 상황이 불안하거든요.” 어른들이 쓴 게 분명한 코멘트를 읽으며 살짝 웃음이 났다. 다른 포스트잇으로 눈길을 돌리다 가장 서툰 글씨에 눈이 멈췄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근데 지금 작가 활동도 되게 잘하시는 거 같은데요?”
 
 @Ross Sneddon

@Ross Sneddon

아마 초등학교 3학년인 어린이가 쓴 것 같은 그 짧은 문장을 본 순간, 잠깐 눈물이 터져나올 뻔했다. 기다려온 응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 문장은 인사치레에 가까운 응원도, 으레껏 건넨 위로도 아니었다. 어린이가 내 강연을 들으며 느낀 바를 담아 내게 남긴 진심의 메시지였다. 어린이에게 내가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면, 나 진짜 잘하고 있는 게 맞구나. 그렇게 믿으면서 계속 해도 되겠구나. 어린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포스트잇이 붙은 종이를 소중하게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하철 안에서 계속 그 문장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와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않고 그가 강연을 따라오기 힘들 거라고, 집중을 잘하지 못해서 분위기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했던 내 선입견에 관해서도 오랫동안 곱씹었다.
 
칠곡의 한 중학교에 강연하러 갔을 때, 나를 초대해 준 선생님은 함께 기차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 학생이 수업시간에 별로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는 것 같아 솔직히 작가님 책도 안 읽고 올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그런데 엄청 열심히 읽고 와서 작가님 말에도 잘 집중하더라고요.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면이 있고, 그걸 모두 겪어보지 않고 ‘이 학생은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알지도 못하면서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이 친구가 과연 이 강연에 적합한 참석자일까?’를 의심한 못난 어른에게 어린이는 오랫동안 용기가 될 메시지를 적어주었다. 그가 그날의 경험을 얼마나 길게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매우 긴 시간 동안 간직하게 될 것 같다. 어린이가 내 글에 붙여준 포스트잇은 이제 내 책상 앞 벽에 붙어 있다. 문득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질 때,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을 때마다 그걸 본다. ‘근데 지금 작가 활동도 되게 잘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렇죠? 저 되게 잘하죠? 절로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우게 된다.  


황효진
책부터 팟캐스트까지 세심하고 다정한 시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고, 때때로 실패하며 배우는 기획자이자 작가. 건강하게 일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 ‘뉴그라운드’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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