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틀림없는 내 편 만들기

우리가 계속계속계속 말해야 하는 이유

 @Jan Baborák

@Jan Baborák

틀림없는 내 편 만들기

‘우웩 인자(Yuck Factor)’라는 게 있다. ‘까닭 없이 여성을 더 불신하고 남성에게 쉽게 권위를 주는 광범위한 사회적 현상’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살면서 차별적 언어나 이미지와 맞닥뜨릴 때마다 안면을 찡그리며 ‘우웩(Yuck)!’ 했던 경험을 곧장 떠올리게 하는 이 훌륭한 표현을 탄생시킨 사람은 학자이자 소설가 시리 허스트베트. 〈내가 사랑했던 것〉(1993)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 남편을 둔 탓에 공석과 사석에서 끝없이 우웩 인자와 맞서야 했다. 예를 들면 부부가 함께 소개된 자리에서 남편의 글은 지성적이고 자신의 글은 가정적이라고 규정당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남편이 “내가 라캉과 바흐친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아내에게서 배웠다”고 직접 말했음에도 지성인이라는 후광은 끝내 남편에게 주어졌다.
 
우웩 인자는 논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닌 만큼 더욱 처치가 곤란하다. 경험적으로는 여성들이 지적이고 유능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전문가’나 ‘대표님’이라고 하면 남성을 연상하는 식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웩 인자가 번성한다. 지성과 권위의 영역만은 아니다. 이는 현실적인 노동 현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리운전 중개 업체에서 “혹여나 있을지 모를 고객의 불평을 우려해” 여성 기사에게 배차를 제한하는 것도 비슷한 경우다. 고객이 여성 운전기사의 실력을 불신하리라는 짐작으로 잠재적 불평을 상상하여 ‘남기사 전용 콜’을 만든 것이다. 난폭운전 가해자 91%가 남성이라는 통계를 생각해 보면 특수 직종에서 이뤄지는 이런 차별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대리운전 단가가 한창 오른 시점 이후에 이런 성별 배제가 발생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우웩 인자는 여성의 생계마저 위협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차별을 당하는 동시에 차별을 행하며 산다. 우웩 인자를 공기처럼 접하면서 사회의 기본값이 차별임을 인지한 여성들은 그리하여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를 언어화하는 법을 배워갔다. 계속 배우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새 성차별주의자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와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두 격언 중 어디에 더 공감하는지는 사람마다, 경우마다 다를 것이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내가 겪는 이것들이 어째서 구조적 문제이며 성차별인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해방감을 느낀 이들도 있고,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중화된 뒤 ‘피곤해졌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부당한 차별을 당하고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자책하고 해결법을 모르던 사람이 ‘그건 차별입니다’라며 선을 긋고 대응할 수 있게 된 경우 분명 아는 것은 힘이다. 하지만 이에 대체로 공감하는 사람도 때로는 문제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던 때의 (거짓된) ‘평화’를 잠시 그리워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차별의 문법을 식별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과거 좋아했던 드라마나 작품을 다시는 전처럼 볼 수 없게 되거나, 주변인들의 외모 지적을 전처럼 적당히 넘길 수 없게 됐을 때. 물론 상식적으로 여기서 변해야 하는 것은 ‘성차별적 드라마’와 ‘여성의 외모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주변인’이지만 현실적으로 이 변화는 매우 느리다. 차별이라는 것이 그렇다. 차별이 일어나는 한 축에는 차별을 유지하려는 상대적 기득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명한 페미니스트 미술사가인 린다 노클린의 표현처럼 특권을 가진 이들은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우월한 힘에 강제로 복종할 때까지 그 특권을 꽉 붙든다’.
 
 
 딸 소피 오스터와 함께 〈엘르〉 프랑스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던 시리 허스베스트는 '우웩 인자'라는 단어를 발굴했다

딸 소피 오스터와 함께 〈엘르〉 프랑스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던 시리 허스베스트는 '우웩 인자'라는 단어를 발굴했다

나는 페미니즘 출판 8년 차다. 페미니즘 언어를 우리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이야기하게 된 이유는 뜬금없게도 ‘악뮤(AKMU)’ 때문이다. 악뮤는 2014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큰 화제를 모으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음악과 예능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그럼에도 음원 차트 1위를 휩쓴 신곡 관련 댓글에 “악뮤를 몰랐는데 노래 좋네요” 같은 내용이 눈에 종종 띄었다. 그렇다! 시간이 흘렀다. 많은 사람이 삶의 다른 단계로 이동할 만큼, 당시의 초등학생들이 성인이 될 만큼 말이다. 이 댓글을 본 악뮤 팬들이 “악뮤는요, 원래는 악동뮤지션이라는 이름의 남매 가수로 둘 다 미성년자 때 데뷔했는데…”라며 알려주는 것처럼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강렬히 느꼈던 페미니즘의 효능을 초심으로 돌아가 읊어볼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2016년 첫 책을 펴내면서 후기에 적었던 한 마디를 다시 힘줘 반복하고 싶다. “페미니즘은 몸에 좋습니다. 섭취하고, 단단해집시다.”
 
이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가슴으로부터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여성주의 텍스트는 몸에 좋다. 뉴스를 보며 분개했을 때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울적해질 때도 정말이지 힘이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는 여전히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이 열린다. 세상의 불의에 대한 지식을 쌓는 일이 즐거울 리 없을 텐데 왜 페미니즘 책은 기쁨을 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세상에 대한 지식이 나은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여성들은 살아가면서 사회를 채운 우웩 인자가 얼마나 굳건하게 번식하는지 실감하게 된다. 이때 개개인은 내 작은 힘을 죽을 때까지 길러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기에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저 혀를 차고 눈을 돌리는 대신 이것을 직시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공기를 맛볼 수 있다. 차별이 기본값이 아닌 세계의 공기를 상상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이때 분명 아는 것은 힘이다. 지식은 틀림없는 나의 아군이다. 오늘도 차별에 맞서 자신의 아군을 늘려가는 여성들의 존재를 떠올리며 책을 만든다.




이두루 
페미니스트 출판사 봄알람 대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을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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