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피에르 샤르팽의 상상하는 본능 || 엘르코리아 (ELLE KOREA)
CULTURE

아티스트 피에르 샤르팽의 상상하는 본능

피에르 샤르팽에게 하얗게 빈 벽만큼 광활한 세계는 없다.

ELLE BY ELLE 2023.06.07
형태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만든 글라스 오브제 ‘스트루투라(Struttura)’. 베네치아의 조르조 마스티누(Giorgio Mastinu) 갤러리를 위한 작업이다.

형태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만든 글라스 오브제 ‘스트루투라(Struttura)’. 베네치아의 조르조 마스티누(Giorgio Mastinu) 갤러리를 위한 작업이다.

유럽 디자인 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디자이너 피에르 샤르팽(Pierre Charpin)의 작업은 헤이의 PC 램프, 리네 로제의 슬라이스 소파 등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그는 프랑스 국공립미술학교인 부르주 보자르(E′cole nationale supe′rieure d’art de Bourges)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1993~1994년까지 멤피스 멤버였던 영국 디자이너 조지 소우든(George Sowden)의 밀란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하며 디자인을 익혔다. 이후 프랑스에 돌아와 스튜디오를 오픈하고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다. 
 
‘Untitled’, ink on paper, 46x60cm, 2019 © Atelier Pierre Charpin

‘Untitled’, ink on paper, 46x60cm, 2019 © Atelier Pierre Charpin

파리 근교 이브리(Ivry)에 있는 피에르 샤르팽의 스튜디오에선 갤러리 크레오, 알레시, 리네 로제, 생 루이, 에르메스 등 수많은 브랜드를 위한 제품이 탄생한다. 그는 올해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열린 EDIDA 어워즈 테이블웨어 부문에서 생 루이 컬렉션 ‘카당스(Cadence)’로 수상했는데, 카당스는 피에르 샤르팽과 생 루이의 두 번째 협업 프로젝트로 가로세로 라인이 완벽한 밸런스를 갖춘 크리스털 테이블웨어다. 피에르 샤르팽의 모든 디자인은 수없는 핸드드로잉, 그 과정에서 버려지는 핸드드로잉 사이에서 태어난다. 
 
알레시를 위한 바구니 시리즈 ‘체스티니(Cestini)’.

알레시를 위한 바구니 시리즈 ‘체스티니(Cestini)’.

 
‘Untitled’, felt pen on paper, 24.5x35 cm, 2020 © Atelier Pierre Charpin

‘Untitled’, felt pen on paper, 24.5x35 cm, 2020 © Atelier Pierre Charpin

우리가 만나는 그의 디자인은 결국 피에르 샤르팽이 시도해 온 모든 드로잉의 한 단면을 ‘캡처’한 결과물과 같다. 피에르 샤르팽의 드로잉에 유독 ‘선’이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피에르의 디자인은 현대적이고 간결하지만 ‘모던’이나 ‘미니멀’ ‘심플’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할 수 없다.
 
생 루이를 위해 디자인한 ‘몰루비에(Mauloubier)’ 카라프 & 컵 시리즈.

생 루이를 위해 디자인한 ‘몰루비에(Mauloubier)’ 카라프 & 컵 시리즈.

 
‘Untitled’, felt pen on paper, 70x100cm, 2018 © Atelier Pierre Charpin

‘Untitled’, felt pen on paper, 70x100cm, 2018 © Atelier Pierre Charpin

단순한 선의 집합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피에르 샤르팽의 캐릭터가 녹아 있으며, 그가 단순한 선으로 이뤄내는 특유의 볼륨감은 거의 구상에 가까운 드로잉이다. 세계적 디자인 브랜드들이 협업 파트너로서 피에르 샤르팽을 선호하는 이유는 핸드드로잉을 선호하는 그의 디자인에 기계가 창조할 수 없는 디테일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갤러리 크레오를 위해 비사차(Bisazza) 모자이크를 이용해 디자인한 테이블 ‘크레셰도(Crescendo)’.
 
‘Dots’, Galerie kreo, colour pencil and stickers on paper, 50x36cm, 2018 © Atelier Pierre Charpin ‘Untilted’, serigraphy, 50x70cm, 2014 © Atelier Pierre Charpin
디자이너로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음에도 피에르 샤르팽은 아직도 작은 스튜디오를 고집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나오는 어시스턴트들은 그의 핸드드로잉을 컴퓨터 작업으로 디지털화하거나 모델로 만드는 일을 하고, 주요 작업 과정의 대부분은 피에르의 손을 통해 완성된다. 
 
피에르 샤르팽의 스튜디오 입구. 시청의 투표용 테이블을 다시 페인팅해서 사용 중이다.

피에르 샤르팽의 스튜디오 입구. 시청의 투표용 테이블을 다시 페인팅해서 사용 중이다.

개인 작업실로 쓰였던 공간을 지금은 미팅 룸으로 바꾸었다. 문 앞에 붙은 나무 수저에서 피에르의 위트가 드러난다. 벽에는 본인의 드로잉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개인 작업실로 쓰였던 공간을 지금은 미팅 룸으로 바꾸었다. 문 앞에 붙은 나무 수저에서 피에르의 위트가 드러난다. 벽에는 본인의 드로잉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아주 오랫동안 어시스턴트 없이 일해 왔어요.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는 시점도 혼자 결정합니다. 온전히 저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일하죠. 물론 결과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줄 작업이지만 말이죠. 그 시간이 쌓여 저만의 스타일로 완성됩니다. 스튜디오에 두 명 이상의 어시스턴트가 있었던 적도 있는데,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제 손이 두 개이기 때문에 두 명이 맥시멈인 것 같습니다(웃음).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할 줄 몰라요.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을 이용해 디자인하는 건 자신을 가두는 느낌이 듭니다. 손으로 그리는 것만큼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그만큼 제가 나이 들었다는 말이겠죠. 매일 수많은 드로잉을 아무 생각 없이, 끊임없이 해요. 하지만 특정한 디자인을 위한 드로잉을 할 때는 머릿속에 생각한 형태를 상상하면서 그립니다.” 
 
최근 작업 중인 드로잉 시리즈. 이번 신작에도 역시 타이틀은 없다.

최근 작업 중인 드로잉 시리즈. 이번 신작에도 역시 타이틀은 없다.

작품을 테이블 위에 두고 거르는 작업 중인 피에르 샤르팽.

작품을 테이블 위에 두고 거르는 작업 중인 피에르 샤르팽.

한때 난독증이 있었고, 유독 숫자에 약한 그는 요즘 숫자가 들어간 드로잉을 시작했다. 작은 숫자 스티커나 본인만의 룰에 따른 숫자를 드로잉하면서 자신의 단점을 다른 관점으로 표현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선과 점을 비롯한 단순한 요소와 흥미로운 볼륨으로 반전을 주는 피에르 샤르팽의 작업세계는 거의 30년 넘는 시간 동안 연마된 결과다. 초기 작업이 라인과 군더더기를 최대한 비우는 작업이었지만, 점점 그 위에 자신만의 위트와 디테일로 형태를 만들고 윤곽을 드러내는 스타일로 확장됐다. 
 
난독증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룰로 나열한 숫자를 그려 벽에 붙여놓았다. 올 가을 베네치아의 한 갤러리에서 선보일 세라믹 오브제 이미지.그는 다양한 스티커를 드로잉에 이용하기도 한다. 숫자 스티커로 작업하고 있는 피에르.심플한 라인으로 흥미로운 볼륨을 만들어내는 그의 스타일을 드로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단순해 보여도 제 드로잉은 수없이 버려지는 드로잉 사이에서 선택된 것들이죠. 드로잉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상상하면서 그리거든요. 〈엘르 데코〉를 위한 커버 아트를 그리는 동안에는 부드러운 그레이 컬러의 창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무언가를 꿈꿨어요.” 
 
바구니, 국자, 엽서에서 드로잉까지 이곳저곳에서 모은 그만의 컬렉션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구니, 국자, 엽서에서 드로잉까지 이곳저곳에서 모은 그만의 컬렉션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피에르는 일정한 룰 없이 의식 흐름대로 벽에 오브제를 전시한다. 종종 기분에 따라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오브제 사이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피에르는 일정한 룰 없이 의식 흐름대로 벽에 오브제를 전시한다. 종종 기분에 따라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오브제 사이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피에르 샤르팽은 자신의 스튜디오를 ‘두뇌의 연장선’이라고 표현한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본능과 생각을 현실세계로 끌어내는 곳이라는 의미다. 
 
드로잉 북 〈아벡 르 데상 Avec le Dessin〉에 수록된 이미지들.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에요. 이곳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거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죠. 제가 만들어내는 모든 디자인은 이 장소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요.”
 
스튜디오에 앉아 사색 중인 피에르 샤르팽.

스튜디오에 앉아 사색 중인 피에르 샤르팽.

스튜디오 곳곳에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디자인과 개인적 취향의 흔적이 두서없이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받은 엽서, 일본 여행에서 모은 소쿠리와 장바구니, 나뭇잎, 박스에 그린 드로잉, 국자, 시계 그리고 사용 용도를 알 수 없는 오브제도 가득하다. 여기저기 붙은 그의 드로잉도 빼놓을 수 없다. 스튜디오에서 흰 벽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전에 오피스였던 작은 방은 메자닌을 만들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침대를 두었고, 아래는 미팅 룸으로 만들었다. 팬데믹 이후에는 오픈 스튜디오의 큰 테이블 위에서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다.
 
미팅룸 벽에는 피에르가 디자인한 아리타 세라믹과 각종 엽서가 붙어 있다. 램프는 그가 디자인한 헤이(Hay)의 PC 램프.

미팅룸 벽에는 피에르가 디자인한 아리타 세라믹과 각종 엽서가 붙어 있다. 램프는 그가 디자인한 헤이(Hay)의 PC 램프.

‘Untitled’, ink on paper, 70x100cm, 2015 © Atelier Pierre Charpin

‘Untitled’, ink on paper, 70x100cm, 2015 © Atelier Pierre Charpin

“각각의 오브제들은 저에게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건 누군가를, 어떤 여행을, 또는 어떤 장소를 떠올리게 하거든요.” 
 
파리의 갤러리 크레오를 위해 제작한 ‘트라페즈(Trapeze)’ 램프.

파리의 갤러리 크레오를 위해 제작한 ‘트라페즈(Trapeze)’ 램프.

‘Untitled’, diptych, uniball on paper, 100x140cm, 2011 © Atelier Pierre Charpin

‘Untitled’, diptych, uniball on paper, 100x140cm, 2011 © Atelier Pierre Charpin

벽에 붙여진 각각의 오브제는 앞에서 보이는 평면이 자신의 메인 캐릭터가 된다. 일정한 방식 없이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에 따라 오브제가 배치되고 주변에 함께 걸린 오브제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발견한다고. 이런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여 스튜디오 벽의 풍경을 완성한다. 
 
피에르가 디자인한 에르메스 카레 ‘라 세르팡틴(La Serpentine)’.

피에르가 디자인한 에르메스 카레 ‘라 세르팡틴(La Serpentine)’.

‘Untitled’, colour pencil on paper, 21x29.7cm, 2007 © Atelier Pierre Charpin

‘Untitled’, colour pencil on paper, 21x29.7cm, 2007 © Atelier Pierre Charpin

“벽은 저에게 하얀 캔버스 같은 존재입니다. 그 속에 오브제를 붙이면서 하나의 풍경화를 완성하는 거죠. 온전히 저를 위해 제가 만든 풍경입니다.” 
초기에는 이 공간에서 편안함과 시적인 느낌을 얻기 위해 하나씩 붙여나가기 시작했던 행위가 매해 한층 적극적으로 더 아름다운 배치, 더 나은 풍경을 만들려는 자화상 역할을 하고 있다. 
 
(왼쪽) ‘Untitled’, Indian ink on paper, 51x36cm, 2021 © Atelier Pierre Charpin (오른쪽) ‘Untitled’, Indian ink on paper, 51x36cm, 2021 © Atelier Pierre Charpin

(왼쪽) ‘Untitled’, Indian ink on paper, 51x36cm, 2021 © Atelier Pierre Charpin (오른쪽) ‘Untitled’, Indian ink on paper, 51x36cm, 2021 © Atelier Pierre Char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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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컨트리뷰팅 에디터 김이지은
    사진 Jean-Nicolas Lechat
    아트 디자이너 이소정
    디지털 디자인 장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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