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영, 빛을 설계하는 여자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고기영, 빛을 설계하는 여자

22년. 1세대 조명 디자이너 고기영이 굳센 기백으로 빛을 심어온 시간이다.

ELLE BY ELLE 2020.03.06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엘르〉가 초대한 7명의 여성. 자기다운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고, 멋진 창조물을 만들며, '나'를 완성해 가는, 멈추지 않는 여자들의 꿈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 다섯 번째, 고기영의 기백. 
 
미니멀한 오프화이트™ 레더 코트는 Low 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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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밤’ 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야간 개장한 경복궁의 고즈넉한 풍경, 줄리언 오피의 ‘걸어가는 사람들’이 담긴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 밤이면 은은한 빛을 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부산 영도의 밤바다를 물들이는 부산항대교의 불빛 그리고 때때로 광안대교를 수놓은 빛의 움직임까지. 모두 조명 디자이너 고기영이 이끄는 ‘비츠로앤파트너스’가 만든 밤의 풍경이다. 고기영이 있기 전, 한국에는 조명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조명이 전기 설비에 불과했던 한국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다채로운 빛의 경험을 설계해 온 고기영은 지금이 시작이라고 말한다.
 
한국에 조명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던 1998년에 비츠로앤파트너스를 설립했다 조명이 전기 설비 취급을 받던 때다. 1세대로서 일말의 의무감이 있었고, 사실 엄청 재미있었다.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니까. 나는 다른 사람이 했던 건 안 한다. 항상 새로운 일을 저지르고 맞든 틀리든 상관하지 않는다. 책임감과 의무감, 즐거움, 어떤 길을 내가 처음 밟는 짜릿함. 그런 게 동력이었다. 물론 행복과 불행의 전체적인 부피를 따진다면 행복이 3%, 불행이 97%였지만(웃음).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이 많았겠다 건축가들에게 나를 조명 디자이너라 소개하면 “조명? 전기 쪽에서 다 하는데 당신이 왜 필요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내가 같이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사우나 가면서 영업할 수는 없으니 어쩌겠나. 공간에 사용할 빛을 계획하고 설계해 사용하면 분명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 특강과 세미나를 계속 열었다.
그 시절 건축 업계 종사자는 대부분 남성이었을 텐데 여자라고는 나 하나뿐이고, 남자 50명 정도와 함께 일하는 식이었다. 비즈니스 관계에서 나를 여성으로 보는 시선도 별로였고, 회의에서 정한 사안을 남자끼리 우르르 담배 피우러 갔다 오거나 사우나 다녀와서 바꿔놓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럴 땐 얼마나 분하던지. 현장에 가면 “젊은 여자가 와서 재수가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현장에서 마녀, 악바리로 불리게 된 사연은 못되고 까칠하게 보이려고 노력한 시기가 있었다. 현장에선 말을 거의 안 했다. 한국에선 목소리 크면 이기지 않나. 그게 싫어서 침묵으로 맞섰다. 그러면 사람들이 좀 무섭게 보더라. 빛을 디자인할 때는 아주 미묘한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이 빛이나 저 빛이나 비슷할 것 같으니 그냥 진행하자는 말을 들으면 타협하지 않았다. 끝까지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늘 그들이 경험해 보지 못해서, 제대로 본 적 없어서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건 통한다고 믿었나 나는 긍정주의자다. 맞고 틀리고는 어차피 50 : 50의 확률로 결정되는 거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면 상황이 긍정적인 면으로 기울어져 60 : 40이 되기도 하더라.
처음 빛 디자인에 눈을 뜬 계기는 이화여자대학교 장식미술과에서 공부하던 시절, 특강을 들었다. 강사가 무대 디자이너였는데 “무대에서는 조명이 중요하다. 시공간을 바꾼다”고 가르쳤다. 빛에 의해 공간이 변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들었기에 그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원 시절, 어느 설계사무실에서 인턴을 하게 됐다. 조명의 레이아웃을 그리는데, 그 조명이 공간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 몰라서 회사 사람에게 물으니 “글쎄, 밝겠지” 이러더라. 그때 생각했다. ‘이 분야를 내가 개척해 볼까?’
그 후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아키텍처 라이팅 디자인 코스를 밟았다 당시 내가 아키텍처 라이팅 디자인 코스 5회 입학생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설계사무실에서 일했다. 대전 엑스포 때문에 조명 설계 개념을 도입한 회사가 한국에 처음 생겼거든. 그 회사에서 조명 설계를 하며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상설 전시실. 천장고가 낮아 천장 구조물 안에 간접 업라이트를 적용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상설 전시실. 천장고가 낮아 천장 구조물 안에 간접 업라이트를 적용했다.

조명 디자인은 빛과 어둠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고기영의 철학이 드러나는 국립중앙 박물관의 야경.

조명 디자인은 빛과 어둠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고기영의 철학이 드러나는 국립중앙 박물관의 야경.

경복궁의 야간 경관.

경복궁의 야간 경관.

 
나는 맨땅에 헤딩하며 일했지만 제자와 후배들은 내가 고생한 걸 딛고, 나를 밟고 올라서서 다른 차원을 봤으면 좋겠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여러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 깊은 프로젝트로 국립중앙박물관을 꼽더라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담당자가 ‘전시 공간에서는 빛이 정말 중요하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덕분에 국내 최초로 토털 조명 설계 계약이 성사됐다.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후 IMF가 터졌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내 꿈이 원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모교에서 강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나인브릿지라는 골프클럽 리조트에서 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그렇게 차린 회사가 비츠로앤파트너스다. 직원 한 명과 시작했다.
빛을 설계하는 당신만의 철학이 있다면 조명 디자인은 빛과 어둠을 모두 설계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조명 디자이너는 빛과 어둠 그리고 사용자에게 줄 수 있는 심리적 감동과 공간 기능 사이의 밸런스를 찾아야 한다. 단순히 공간을 밝히거나 멋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촬영을 진행한 이곳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지난해에 완공된 비츠로앤파트너스의 최근작이다. 문을 열자마자 ‘인스타 성지’가 됐다. 내외부 조명을 모두 담당했는데 지상층은 전부 공원이고 건물이 지하로 들어가는 구조라 조명 디자인의 중요도가 높았고, 공간을 다각적으로 해석해야 했다. 종교적 건물이라는 점에서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았고, 전시실의 경우 전시물의 가시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미션도 있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어둠을 먼저 생각했다. 어둠을 기본값으로 놓고 빛을 차츰 그려갔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장소이니만큼 새로운 방식으로 이곳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는데, 사실 아쉬움이 남는다. 예산이 충분치 않아 한계가 많았다. 작업자들이 돈 문제로 공사 중에 도망가기도 했다.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저예산의 공공기관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의미 있는 도전이니까. 나는 지금도 여전히 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빛을 보여주고 싶다.
지금도 여전히 이화여대 디자인 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한다. 현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동안 틈틈이 학생을 가르치는 이유는 한국의 조명 디자인은 지금이 시작인 것 같다. 이제야 공간과 빛에 대한 접근이 다채롭게 이뤄지고 있다. 나는 맨땅에 헤딩하며 일했지만 제자와 후배들은 내가 고생한 걸 딛고, 나를 밟고 올라서서 다른 차원을 봤으면 좋겠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그게 내 역할이다. 후배가 조명 수업을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커리큘럼을 통째로 다 준다. 후배들에게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 역시 내 할 일이다.
후배들이 여성으로서, 또 전문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구축하기를 바라나 나는 젊었을 때 주로 검은색, 정장, 힐 차림이었다. 나이 들어 보이려고 노력한 부분도 있지만, 작은 것에도 예민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 예민한 성질을 지닌 빛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니까.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미지와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성별과 관계없이 전문가로서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여성성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정의하고 만들어야 한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화장을 하지 않고, 힐을 신지 말라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나다운 것’이 뭔지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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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사진 맹민화
    에디터 이경진
    스타일리스트 유리나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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