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시인 신달자가 마주한 몸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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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시인 신달자가 마주한 몸

늙어가는 몸은 자신에게도 낯선 존재다. 시인 신달자가 팔순에야 비로소 기록한 몸의 말, 그 낱낱이 아름다운 신음.

전혜진 BY 전혜진 2023.06.05
화이트 재킷과 셔츠는 모두 QYU.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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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땐 한 번도 생각조차 못 해본 육신과의 화해, 운명과의 화해랄지. 이 마음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스무 살에 등단한 이후 만 80세에 열일곱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그때와 지금, 시집을 내는 마음은 다른가요 
 
첫 시집은 아무래도 가슴이 더 뛰었겠지만, 열일곱 번을 내도 마음은 똑같습니다. 책은 자신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사진을 찍었지만, 내 모습을 보는 일은 여전히 괴롭네요(웃음). 시도 자신의 살점을 보여주는 부끄럽고 괴로운 일인데요.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나면 속이 좀 시원하달까요.
 
그간 시로 몸과의 투쟁과 화해에 관한 얘기를 줄곧 해왔지만, 80대 첫 출간작인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은 유독 더 맹렬하게 느껴집니다 
 
이번 시집은 누가 절로 써준 듯한 느낌이 들어요. 암 투병에 이어 최근 몇 년간 교통사고와 골절, 수술이 겹치며 몸의 말이 비로소 터져나온 게 아닐는지. ‘나의 양떼들’에서 “고통과 신음과 통증들은 모두 나의 양떼들이라. 나는 이 양들을 몰고 먹이를 주는 목동”이라는 표현처럼 내 몸으로 오는 것들을 어떻게 버립니까. 저는 그저 목동이지요. 젊을 때는 육신에 고통이 찾아오면 쫓아내느라 맹렬한 힘이 필요했는데, 이제 순응합니다. 아플 때마다 병실과 집 안 식탁 곳곳에 메모를 두고, 맹렬하게 시를 썼어요. 
 
스무 살에 등단한 이후 신달자는 총 17권의 시집을 냈다. 맨 위에 놓인 것이 등단 59년을 기리며 4월에 출간한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스무 살에 등단한 이후 신달자는 총 17권의 시집을 냈다. 맨 위에 놓인 것이 등단 59년을 기리며 4월에 출간한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순응’이란 변화된 자기 몸을 정확히 마주하고 화해하는 일인가요. 책 여는 말에 “내 것인데 내 말을 안 듣는 육신이 미운 적이 있고, 육신이 정신을 앞지르는 나이에 이르러 쇠한 육신에게 미안해한다”고 적은 것처럼 말이죠
 
젊을 땐 육신을 잘 몰라요. 언제든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아파야 비로소 진짜 몸을 깨닫게 되죠. 저도 한때는 정신이 가장 근사한 줄 알았고, 그것만 좇으려 애쓰고 살았는데요. 마치 복수하듯 몸이 나를 괴롭히며 지금껏 쌓아놓은 정신세계를 잃게 만드는구나 싶어요. 결국 시로 몸과 화해하게 됐어요. 
 
몸이 늙어간다는 것, 나이 듦에 따른 신체 변화는 팔순을 넘어서도 결코 초연하지 않은 일인가요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어머니가 어디 아프다 하면 “엄마 안 아픈 날 있었어?”라고 타박했던 거예요. 내가 그 주인공이 되고 보니 너무 내 몸이 낯설고, 모든 게 처음이라 혼란스러운데 말이죠. 어머니는 그때 자기 몸을 인정하셨을까요. 
 
시에는 몸의 상처와 고통, 신음이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애정이나 희망도 느껴집니다 
 
80년간 부려먹은 몸의 항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비로소 사과하는 과정이니까요. 아픈 와중에도 희망과 따스함이 있거든요. 늙은 몸을 보듬다 보면 섭섭한 사람에게도 먼저 전화를 걸게 돼요. 더 낮고 작아진 채로 주변 소리를 잘 듣게 되죠. 젊을 땐 한 번도 생각조차 못 해본 육신과의 화해, 운명과의 화해랄지. 이 마음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시인은 작은 덩굴이에요. 내가 좋은 덩굴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처럼 아픈 사람에게 내 기록이 뻗어나가 힘이 되리란 믿음이 있어요. 
 
‘브래지어를 푸는 밤’이라는 시가 유독 와닿았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죠. “브래지어에는 이빨이 있는가. 서리 묻은 브래지어에서 어석어석 얼음 깨무는 소리 들린다”는 생생한 비유가 유독 와닿던 시기가 있었을까요 
 
우리는 매일 잠들기 전 브래지어를 풀죠. 브래지어에는 감미롭고 감각적이기도, 따뜻하기도 혹은 도발적이거나 뭔가 숨긴 듯 부끄러운 면까지 여러 관념과 감정이 얽혀 있잖아요. 세월이 흐르면 그간의 관념은 사라지고, 막상 내 브래지어 속에는 이제 얼음덩어리만 뚝뚝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독한 외로움을 얘기했어요. 
 
제목이 된 시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에서 부엌과 밥 지어 먹는 일을 전쟁통에 비유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물과 기름이 끓고, 칼질하고, 믹서가 왱왱 돌아가는 전쟁통 같은 공포 속에서 발견한 한 끼. 어느 날 밥을 지어 먹다가 전쟁과 평화가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부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전쟁의 핵심은 오늘도 먹는 일, 먹을 걸 만드는 일이다.” 우리 삶에도 전쟁 같은 상황이 많지만 다 헤치고 살지 않나요. 전쟁과 평화가 함께하는 것이 곧 삶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시 같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간 수발했고, 시어머니의 병환을 돌보았으며,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기운 가세에 세 딸을 키우는 가장이 돼야 했던 굴곡의 세월에도 시를 내려놓지 않았죠. 그만큼 시를 사랑하나요 
 
아마 나는 시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보다 자신을 사랑했겠죠. 내 속에 끓어오르는 것들을 적었고요. 여성에게 들끓는 사회적 욕망은 중요해요. 사회에서 무엇을 해내리라는 여성들의 욕망은 결코 꺾을 수 없는 의지나 힘 그 자체죠. 제 삶에서 때때로 찾아오는 고통도 언젠가는 내 시를 세상에 던지고 말 거라는 욕망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만 할 수 있는 말을 세상에 남겨놔야 할 거예요.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죠.
 
데뷔는 1964년 〈여상〉 신인문학상이었지만, 결혼 후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재등단했습니다. 그 고마운 마음은 시 ‘그리운 목월 아부지’에도 담겨 있는데요 
 
숙명여대 재학 당시 박목월 선생의 특강을 자주 들었고, 그때 인연이 이어졌어요. 가장 노릇하며 시를 버리다시피 했을 때, 우연히 종로에 들렀다 선생님을 만났죠. ‘요즘도 글을 쓰느냐’고 물었고, 아니라고 하니 다시 써보라더군요.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원효로에 있는 선생님 댁에서 시를 배웠어요. 그렇게 두 번째 등단을 했죠. 그분 덕분에 지금껏 문학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나중에 등단하고 나서 여쭤보니, 선생님이 제 몰골을 보자마자 시를 쓰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고, 몇 번만 올 줄 알았는데 매번 오늘 걸 보며 ‘되겠구나’ 생각하셨다고요. 가끔 제 시집이 나오거나, 비가 오면 좋은 위스키와 시집을 들고 원효로에 가고 싶어요. 
 
처음 시에 흥미를 느끼게 된 순간이 기억납니까. 아버지의 일기장에 적힌 글귀들이 계기가 됐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오늘도 나는 홀로 울었다.”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 일기장의 모든 첫 줄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아버지는 홀로 울 사람도 아니고, 울 일도 없고, 외롭지 않은 사람인데 ‘나는 홀로’라는 표현이 모든 시의 첫 줄마다 자리한 게 이상했어요. 아버지의 마음이 궁금한데 직접적으로 여쭤볼 수는 없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거나 보려면 무엇을 하면 될까 생각하다 문학으로 향했습니다. 국문과인 오빠에게 책을 빌리고, 밤새 김소월 시를 필사하면서요. 
 
당신의 시 인생에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나요. 재등단 이후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 기역자도 몰랐던 어머니가 글을 익혀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1973년 12월 18일)”라고 방명록을 남기셨습니다
 
1978년에는 박목월 선생님과 어머니가 같은 해에 돌아가셨어요. 봄에 먼저, 그리고 가을에. 제 삶에서 가장 초라할 때 돌아가셨는데 “너는 꼭 시인이 될 거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셨죠. 지금까지도 흔들리는 저를 잡아주는 지팡이 같은 말이에요. 당신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인생이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딸의 꿈은 꼭 이루겠다고 다짐한 여성이지요. 1950년대에 여자가 대학에 가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골에서 셋째 딸을 마산여고로 유학 보냈죠. 본인은 저고리 하나 못 사면서 교육비를 대고. 집안 어른들이 “딸을 도시로 보내다니. 당장 데리고 오거나 네가 나가라”는 타박에도 넷째 딸까지 명문고에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당신의 시를 두고 하신 말씀 중 기억에 남은 것은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1등 했을 때 어머니가 시상식에 오셨어요. 오백 원인지, 오천 원인지 상금을 모두 드렸더니 엉엉 우시더군요. 돌아가신 이후에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 병원 빚을 다 갚았을 때나, 또 다른 상금을 타면 어머니 산소를 찾아 그 앞에 돈을 묻었어요. 
 
어머니께서 늘 당부하셨다는 ‘평생 공부해라, 돈을 벌어라, 행복한 여자가 되어라’ 이 세 가지를 모두 이룬 것 같습니까

어머니는 제게 꼭 돈을 벌고, 여자로서 행복하라고 하셨어요. 그중 제일 먼저는 공부고요. 공부를 하고, 돈이 있어야 여자가 하고픈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하셨죠. 어머니가 돌아가실 당시 저는 가장 초라했지만, 지금의 저를 보면 그래도 잘했다고 하시지 않을까요.
 
여성 작가들이 해외 수상이나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드높이는 지금과 달리 당시 여성 시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 어릴 적은 그랬지만, 80년대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글을 필요로 했어요. 여성이 취직하고, 사회적 욕망을 지니면서부터죠. 그때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회사들은 꼭 사보를 하나씩 냈는데, 시인의 글도 실었습니다. 저도 시대상과 여성들에 대한 관점이 담긴 원고를 청탁받고는 했죠. 시는 아니지만, 90년대 발표한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에서도 물길 위를 걸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대 여자들을 그렸는데, 여성들이 많이 공감해 주었죠. 하지만 요즘에도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물어보지 않는 사람이 많지요. 내가 뭘 잘하고, 뭘 해내고 싶어 하는지 자기 연구가 꼭 필요해요. 하나라도 잡히면 조금씩 해보세요. 조금씩 10년이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120세까지 산다는데, 긴 시간 뭘 할 건가요? 하고자 하는 욕망은 나이가 들수록 더 커진답니다. 
 
시를 쓰는 일은 60년을 지속해도 즐겁나요 
 
서정주 선생님이 “시인으로 60년 됐는데, 여전히 나도 백지를 보면 할 말이 없어”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납니다.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시를 버리지 못하는 건 어쨌든 타인이 아닌 내게서 나온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엘르〉 독자는 주로 젊은 여성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늙은 몸을 상상치도 못할 이들에게 이 시가 어떻게 닿길 바라나요 
 
언젠가 떠날 것이기 때문에 나만 할 수 있는 말을 세상에 남겨놔야 할 거예요.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죠. 나는 늘 내게 잘 못하고 살았어요. 그러니 내 몸은 삶을 지탱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까요. 그래서 남깁니다. 시인이라는 내 역할을 끝까지 지키고, 좋은 말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내 몸과 나에 대한 사랑 고백일 겁니다. 
 
곧 등단 60주년을 맞습니다.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은관문화훈장 수상 등 시인으로서 영광뿐 아니라 여류 시인으로 후배의 길을 터주며 숱한 발자취를 남겨왔는데, 시로 더 바라는 것이 있으신가요 
 
대표작을 바라요. 박목월의 ‘나그네’는 당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등장하지 않는 교과서가 없었는데, 그때 선생님에게 “역시나 박목월의 대표작은 ‘나그네’죠?”라고 물었더니, “내 대표작은 오늘밤에 쓸 거다”라고 하셨거든요. 대표작은 결국 눈 감는 날까지 나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웃음). 머뭇거리지 않고 꺼내놓을 시 한 편 더 쓸 수 있다면 좋겠네요. 
 
오늘밤에는 어떤 시를 쓰시겠습니까 
 
상승된 몸의 온도. 지금 내 몸이 그래요. 오늘 〈엘르〉를 만난 기쁨에 대해 쓸 것 같아요. 
 
블랙 원피스는 Gaze De Lin. 네크리스는 Swarovski. 워치는 Vintage Cartier by Bean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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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64년 〈여상〉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1972년 〈현대문학〉으로 재등단했다. 시집 〈봉헌문자〉 〈아버지의 빛〉 〈간절함〉 〈열애〉 〈북촌〉 및 저서 〈고백〉 〈물 위를 걷는 여자〉 〈백치애인〉 등이 있다. 최근 등단 59년을 기리는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을 펴냈다. 석정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수상 및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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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전혜진
    사진 영배
    헤어 & 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채원
    아트 디자이너 박서연
    디지털 디자인 장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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