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조틴트 판화 속 숨겨진 이야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CULTURE

메조틴트 판화 속 숨겨진 이야기

희소성, 상징성 그리고 갖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 유럽과 미국 경매시장에서 서양 고전 미술의 아우라(Aura)를 엿보다.

ELLE BY ELLE 2023.05.23
 
‘데본셔 공작부인과 그녀의 딸(The Duchess of Devonshire and her child)’, Printed by George Keating after Sir. Joshua Reynolds, 1787.

‘데본셔 공작부인과 그녀의 딸(The Duchess of Devonshire and her child)’, Printed by George Keating after Sir. Joshua Reynolds, 1787.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해외 유명 경매 사이트를 보면 올드 마스터 판화(Old Master Print)에 대한 안내를 게시할 때가 있다. 작품 자체가 희귀하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의 미술품을 거래하는 올드 마스터 마켓은 갈수록 규모가 한정되고 축소될 수밖에 없지만, 판화는 그나마 공급과 수요가 있는 편이다. 지금도 미술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거장의 판화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지난 1월, 크리스티 런던의 올드 마스터 판화 전문가인 팀 슈멜처(Tim Schmelcher)는 크리스티 뉴욕과 런던에서 거래되거나 거래 예정인 올드 마스터 판화에 대한 정보와 함께 각 판화의 낙찰가와 추정가를 안내한 글을 자사 홈페이지에 올렸다. 유럽 최초의 목판화부터 뒤러 · 렘브란트 · 고야 등 거장의 에칭(Etching) · 인그레이빙(Engraving) 판화를 다뤘다. 그에 따르면 유럽과 미국 경매시장에서 거래되는 올드 마스터 판화는 기법에 상관없이 유럽에서 14세기부터 18세기 말 혹은 19세기 초까지 600여 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모든 인쇄 이미지를 가리킨다. 미술사에서 지배적인 판화 기법이었던 에칭 판화가 주요 경매 품목이다. 그러나 판화에 조금만 관심을 두면 판화 기법도 매우 다양하며, 저마다 다른 심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에칭과 같은 동판화 계열이라도 18세기 영국에서 발달해 유럽 전역에서 미술 애호가들의 수집욕을 불러일으켰던 메조틴트(Mezzotint) 판화도 그중 하나다.
 
‘결혼의 신 조각을 장식하는 세 여인(Three Ladies Adorning a Term of Hymen)’, Printed by Thomas Watson after Sir Joshua Reynolds, 1776.

‘결혼의 신 조각을 장식하는 세 여인(Three Ladies Adorning a Term of Hymen)’, Printed by Thomas Watson after Sir Joshua Reynolds, 1776.

메조틴트는 이탈리아어 메차 틴타(Mezza Tinta)에서 유래했다. 우리말로 ‘중간 색조’란 뜻의 단어다. 흔히 말하는 그러데이션 효과를 판화에 자연스럽게 반영한 기법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지금의 픽셀과 유사하게 동판 표면에 뾰족한 톱니 모양의 로커(Rocker)를 굴려 무수히 많은 작은 구멍을 뚫은 후 뷰린(Burin)이라는 조각도로 이미지를 만든다. 로커를 굴렸을 때 금속판에 꺼칠꺼칠하게 올라오는 부스러기를 버(Burr)라고 하는데, 완성 판화에서 흰색으로 나오길 원하는 부분의 버를 조각도로 긁어낸다. 이미지를 새긴 다음 동판 전체에 잉크를 덮어 닦아주고, 그 위에 종이를 올려 프레스로 강하게 찍어내면 음각 기법의 메조틴트 판화가 완성된다.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메조틴트는 17세기 전후에 등장한 것으로 본다. 기존 기법인 에칭이 선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면, 메조틴트는 흑과 백 혹은 컬러 톤(Tone), 즉 색조의 짙고 옅음으로 이미지를 만든다. 이는 회화의 명암을 잘 표현할 수 있으며, 표면에 광택이 도는 유화를 아름답게 재현할 수 있다. 무른 구리를 판(Plate)으로 쓰기 때문에 프레스로 찍어낼수록 음각한 표면이 점점 평평해져 300장 이상 제작하기 힘들다. 이 중에서 100장 정도를 고품질로 제작할 수 있다. 반면 판의 무른 성질 때문에 이미지를 부드럽게 새겨넣을 수 있고, 수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시간과 노동을 많이 들여야 하기에 소수의 전문가만 이 기법을 사용했다. 그렇다 보니 대형 역사화나 풍경화에는 이 판화 기법이 적합하지 않았다. 반면 초상화나 정물화, 동물화 등 비교적 단순한 주제와 피사체, 배경을 묘사하는 회화 장르에 적합했다.
 
‘탈러턴 대령(Colonel Tarleton)’, Printed by John Raphael Smith after Sir Joshua Reynolds, 1782.

‘탈러턴 대령(Colonel Tarleton)’, Printed by John Raphael Smith after Sir Joshua Reynolds, 1782.

이는 18세기 초상화 시장이 발달했던 영국에서 메조틴트 판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8세기 이전까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그럴듯한 화가를 배출하지 못했던 영국에는 이즈음 서양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초상화가가 등장했다. 바로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 초대 원장을 지낸 조슈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서사, 이상화된 인체와 자연 풍경 묘사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예술 양식을 상류층 초상화에 접목한 ‘장엄 양식(Grand Manner)’을 선보였다. 사진이 없던 시대에 사실적 묘사 대신 실제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멋있게 인물을 묘사했으며, 초상화 주인의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는 물론 내면의 성품까지 세련되게 ‘포장하는’ 초상화를 그렸다. 영국 초상화의 기틀을 잡고 꽃피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레이놀즈는 메조틴트 판화의 효용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장엄 양식 초상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메조틴트 판화가들에게 제작을 맡겼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감독했다.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제임스 매카들(James McArdell), 윌리엄 디킨슨(William Dickinson), 존 라파엘 스미스(John Raphael Smith), 밸런타인 그린(Valentine Green) 등 당대 최고의 메조틴트 판화가들이 레이놀즈의 작품을 판화로 만들었고, 이는 미술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1779년부터 1782년까지 레이놀즈가 당시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던 귀부인을 모델로 그린 전신 초상화 아홉 점을 밸런타인 그린이 메조틴트 판화로 제작한 ‘현대 미녀 Beauties of the Present Age’ 시리즈는 지금까지도 미술애호가의 수집욕을 불러일으키는 걸작으로 꼽힌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시리즈의 교정쇄(Proof; 인쇄물의 교정을 위해 임시 조판된 내용을 찍어내는 인쇄물)를 모두 수집한 영국의 사업가 롭 딕슨(Rob Dixon)은 레이놀즈가 생존했을 때 밸런타인 그린이 각 판화의 교정쇄를 50개씩 출판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린이 단골 고객에게 일반 판화 가격의 2배 이상을 받고 사전 판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중 ‘러틀랜드 공작부인(Duchess of Rutland)’은 현대에 와서도 다른 여덟 점에 비해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1816년 러틀랜드 공작가의 별장인 벨보아 성의 화재로 초상화 원작이 소실되기도 했고, 그린이 제작한 기존 동판화 원본도 변형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케펠(Lady Elizabeth Keppel)’, Printed by Edward Fisher after Sir Joshua Reynolds, 1760.

‘엘리자베스 케펠(Lady Elizabeth Keppel)’, Printed by Edward Fisher after Sir Joshua Reynolds, 1760.

신비로운 빛의 표현과 강렬한 명암 대비, 부드러운 표면 묘사, 낭만적인 주제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메조틴트 판화는 18세기 영국 초상화가들과 전문 메조틴터, 인쇄 및 출판업자들을 매료시켰다. 영국이 자부하는 미술의 한 장르이자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 레이놀즈뿐 아니라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조지 롬니(George Romney), 조지프 라이트(Joseph Wright) 등 영국 유명 초상화가들의 작품이 메조틴트 판화로 제작돼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렸다. 부와 권력을 지닌 귀족들, 사교계의 유명인사, 인기 여배우, 전쟁 영웅 등을 그린 유명 화가들의 초상화 판화는 상류층을 선망하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수집 품목이었다.
 
‘러틀랜드 공작부인(Duchess of Rutland)’, Printed by Valentine Green after Sir Joshua Reynolds, 1780.

‘러틀랜드 공작부인(Duchess of Rutland)’, Printed by Valentine Green after Sir Joshua Reynolds, 1780.

18세기 중 · 후반 영국 판화시장의 부흥은 산업혁명을 앞둔 자유시민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도시의 근대화가 이뤄지는 시민사회에서 메조틴트 판화는 갓 부상한 신흥세력 · 중산층 · 부르주아에게는 상류층과 연결되는 ‘가교’ 같은 것이었다. 레이놀즈 같은 초상화 대가의 작품, 기술적으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메조틴터와의 협업, 18세기의 고귀하고 우아한 상류층에 대한 팬덤, 그들이 착용한 아름다운 옷과 장식구에 투영된 상류층에 대한 선망, 그것을 신비롭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창출하는 메조틴트 기법, 매체의 특성상 한정된 수량의 판화라는 점에서 충분히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킨 것. 이에 가장 매혹을 느낀 사람은 상류층에 자신을 투영하고 싶은 신흥 부르주아들이었다.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것, 상류층이 향유하는 모든 것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 당시 메조틴트 초상화 판화의 지향점은 시민들의 사치품이 되는 게 아니었을까. 18세기의 인쇄 기술로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 메조틴트 초상화 판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권력과 부를 보여준 셈이다.
 
‘멍청이들(Morons)’, Banksy, 2006.

‘멍청이들(Morons)’, Banksy, 2006.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NFT 관련 이슈를 보면 18세기 메조틴트 초상화 판화와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당대 미술시장에서 새로운 수익 창출 모델로 등장했다는 점, 원본의 실재를 파악하기 어렵거나 부재한다는 점, 작품마다 고유의 값을 부여받고 한정된 수량으로 판매돼 희소성을 지녔다는 점, 소비가 작가 혹은 작품 속 주인공의 팬덤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재작년 뱅크시(Banksy)의 ‘멍청이들(Morons)’을 구매한 블록체인 회사 인젝티브 프로토콜(Injective Protocol)은 ‘번트 파이낸스(Burnt Finance)’라는 유튜브 계정을 통해 그들이 구매한 작품을 불태우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버닝 세러모니(Burning Ceremony)’는 인터넷에 실시간 공유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실물 작품을 구매한 인젝티브 프로토콜은 이를 NFT화한 후 실물을 없앤 덕분에 오히려 소유권의 가치를 올렸다. ‘멍청이들’은 약 1억 원이지만 그것을 소각한 후 발행한 NFT로 약 4억 원을 벌어들인 것이다. 작품은 경매에서 그림을 사는 이들을 비꼬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지난해 10월 11일,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는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판매한 ‘화폐(The Currency)’ 1만 점 중 4800여 점을 불태우는 영상을 공개했다. 1만 점의 작품 중 NFT로 작품의 소유권을 갖겠다고 선택한 4800여 컬렉터의 실물 작품을 태운 것이다. 약 159억 원어치다. 이처럼 수백 년이 지나도 미술시장을 견인하는 동력은 한결같다. 희소성과 상징성 그리고 소유욕. ‘갖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이 짙고 선명할수록 환영받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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