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내 몸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걸그룹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복잡한 마음에 대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엘르보이스] 내 몸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걸그룹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복잡한 마음에 대해

어렵게 사랑 받고, 또 쉽게 미움 받기도 하는 걸그룹. 그들을 오래 응원해온 뮤지션 김사월이 깨달은 것들.

이마루 BY 이마루 2023.02.07
 
여자를 사랑하는 방식
2세대 걸 그룹이라 불리는 이들이 TV에 나오던 2010년대, 나는 성적에 맞춰 진학한 서먹한 대학에서 적성에 그리 맞지 않는 수업을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수업이 끝나면 종로에 있는 세무사 학원에서 인터넷 강의를 촬영하는 단순노동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학교 근처 고시원에 살았다. 알바가 없는 금요일과 주말, 공용 텔레비전이 있는 자리의 소파는 내 차지였다. 가끔 아래층에 살던 친구 두 명도 함께 모였다. 한 친구는 샤이니의 종현을 좋아했고, 다른 한 친구는 나와 비슷한 온도로 걸 그룹에 미쳐 있었다. 원더걸스, 카라, 소녀시대, 투애니원, 브라운 아이드 걸스…. 미디어는 복귀하는 그녀들의 새로운 화장법과 다이어트 방법에 열광하는 동시에 때때로 경멸했다. 스타일과 춤에서 어떤 식으로든 섹슈얼한 코드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이들을 알렸다. 나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세계에 중독돼 〈뮤직뱅크〉 〈쇼! 음악중심〉 〈인기가요〉를 매주 생방송으로 챙겨 보았고 방송이 끝나면 편의점 과자를 미친 듯이 입에 쑤셔넣었다. 그야말로 못생기고 가난한 20대 시절이었다. 이런 나와 대비되는 듯한 TV 속 그녀들의 표정과 생김새, 다리 모양과 비율, 구석구석을 마치 내 것처럼 혹은 그들의 몸을 유성애적으로 사랑하던 이들처럼 탐미했다.
 
좋아하게 된 덕질 대상은 계속 바뀌었지만, 나는 대부분 순결하면서도 반항적이며 아름다움으로 세상의 평판을 지배하는 존재에 관심이 있었다. 연애하고 싶은 대상보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여자를 ‘덕질’했다. 이런 나도 학교에서 스치거나 혹은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설렘을 느끼기도 했으나 비대한 자아와 형편없는 자존감을 가진 20대 초반의 여자아이에게는 설렘도 고통이었다. 미디어에 나오는 여성과 내가 같은 성별의 스펙트럼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스스로의 존재가 의문스럽고 혐오스러웠다. 그런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세상이 원하는 높은 기준을 맞추게 된 여자들도 미디어에서 추앙받는 동시에 손쉽게 가치절하당한다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여자들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여자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 2014년 즈음, 여성성이라 일컬어지는 아이템들(새빨간 립스틱이나 하이힐, 과장된 실루엣)을 걸치기 시작하며 비로소 ‘젊은 여자’처럼 여겨지게 됐다. 나는 이런 사실에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항상 뚱한 표정의 못난이로 별 예쁨을 받지 못하다가 메이저한 ‘미’의 세계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 너무나 달콤했다. 그러나 실제로 달콤한 것들은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날씬해 보이고 싶어서 조금만 먹다가 참지 못해 폭식하고, 다시 살이 찌고 살을 빼는 영원한 다이어트를 반복했다. 구멍이 잔뜩 난 이런 나라도 욕망을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그러다 결국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없었고, 나도 더 이상 그러기를 원하지 않음을 자각했을 때, 20대 후반을 지나며 더 이상 어려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욕망받는 여성에서 탈락되는 경험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젊은 여자의 자격이 박탈되고 나니 뜻밖에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2세대 아이돌들은 2010년대 특유의 여성 혐오를 정면으로 통과한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설리와 구하라의 죽음이 있었다. 아마 그녀들을 사랑한 많은 이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선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주변의 여자들과 눈물 젖은 전화를 나눴다. 괜찮니? 너무 무섭고 힘들어…. 우리는 그때 누군가가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무서워서 안달이 났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소녀시대와 카라가 복귀했을 때 살아서 돌아온 그녀들이 과거보다 더 반짝거리는 것에, 우리도 살아서 그걸 보고 있다는 것에, 전우애와 사랑과 존경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눈물이 흘렀다. ‘한스러운 눈물’.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지금의 나는 지독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뛰어든 4세대 여자 아이돌의 음악을 들으며 아침 러닝을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완벽하길 요구받았을 그들의 도자기 같은 피부와 티 없는 인성, 선명한 복근을 유지하는 동시에 가느다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있는 가창력을 가진 그녀들을 떠올려본다. 시대가 흐를수록 더 촘촘하고 가팔라지는 기준을 충족한 소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정말 그녀들은 괜찮을까. 그리고 그녀들을 사랑하는 우리도 괜찮을까. 그러나 팡팡 터지는 비트와 듣기만 해도 싱그러운 음색이 에너지를 선사하는 이 세계의 매력을 사랑하게 되면 결국 어찌할 줄 모르고 아이돌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퍼포먼스를 완성하기 위해 들어간 수백 수천 가지의 노력을 감추고 완성된 무대 앞에서 아름답게 웃고 있는 ‘전문가’들. 그들의 노랫말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자아상을 흡수하고 있을 지금 10대 여성들이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게 될지, 이 시절을 무엇으로 기억하게 될지 궁금하다. 여러 시간을 통과한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들을 모두가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가 무엇에 영향을 받았고,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그래서 어떻게 더 단단해졌는지를.
 
김사월
메모 같으면서도 시적인 노랫말을 쓰는 싱어송라이터. 2020년 에세이 〈사랑하는 미움들〉을 썼고, 석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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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이마루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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