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영화의 낭만과 책의 무한함과 삶의 기적처럼

이미화 작가의 에세이 <영화관에 가지 않는 날에도>

 
영화의 낭만과 책의 무한함과 삶의 기적처럼
이미화 작가의 에세이 〈영화관에 가지 않는 날에도〉는 영화를 사랑하다 못해 아예 그 자체가 영화관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영화를 애정하는 저자의 마음이 애틋하게 묻어나오는 에세이다. 2022년 한 해 내가 읽은 에세이 집 중 가장 크게 웃으며 읽었던 책인 동시에, 2023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을 터준 책이기도 하다. 에세이 마지막에 작가는 책에 카메오처럼 출연한 지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화관에서 가장 처음 본 영화를 기억하고 있어?” 그 질문을 읽자마자 책을 덮고 내 기억을 돌아봤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가 분명 영화관에서 본  최초의 영화는 아닐 테지만, 불편한 영화관 의자에 몇 시간 동안 앉아 자세를 쉼 없이 고쳐가며 사람들 팝콘 먹는 소리가 와그작와그작 들리던, 빠르게 지나가는 자막을 몇 번씩 놓치며 보던 커다란 화면. 그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던 영화관의 기억은 2003년에 개봉한 영화 〈터미네이터3-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다.
 
15세 관람가. 당시 내 나이는 11세. 영화 내용을 이해할 리 없었다. 심지어 이전 시리즈를 성인이 되고 나서 봤다. 전편 내용도 모르는 데다가 영화 자체도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었으니 열한 살짜리 머리로는 이해될 리가 만무했다. 영화 보는  내내 엄마에게 귓속말로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관람자에게 여간 민폐가 아닐 수 없다. 거의 모든 장면마다 “이게 무슨 뜻이야?” “얘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거야?”라고 물었으니 말이다. 물론 엄마가 친절하게 답해 준 건 초반 두어 번의 질문 정도였다. 그 뒤로는 대답해 주지 않았기에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물음표만 가득 채우다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던진 질문, 그러니까 두 살 터울의 언니가 도중에 이해를 포기하고 잠들어 버린 것에 반해 영화 내용을 이해하고자, 내 눈앞에 펼쳐지는 장대한 장면을 흡수하고자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던 행위가 영화에 대한 사랑의 첫 물꼬였다고 생각한다.
 
“영화 좋아해요. 언젠가는 영화에 관한 일,  영화에 관한 글, 조금 더 노력하면 영화 찍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이 말을 실제로 내뱉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물론 친한 지인에게는 영화를 향한 열망을 자주 내비치지만, 작가로 활동하면서 만나는 동종 업계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부끄러웠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직접 청춘을 바치며 영화를 행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걸 알았고, 나는 언제나 동경하는 열정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그래서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어쩐지 ‘더 나중에’ ‘더 많은 준비가 되어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좋아한다’고 말이다. “좋아하기는 하는데, 그냥 취미로 보는 정도예요.”
 
물론 취미가 영화 보기는 맞지만, 저 문장 사이에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영화를 봅니다’ ‘혼자서 영화관에 잘 가요(가끔 혼자 영화 보는 게 훨씬 좋아요)’ ‘좋아하는 영화는 몇 번씩 돌려 봅니다’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 읽고 관련된 것을 전부 찾아봐요!’라는 문장들이 빠져 있다. 그런 행위는 누구나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을 차츰 고친 것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글쓰기에 대한 즐거움과 소설 쓰기에 대한 애정을 숨기고 있다는 독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언제나 ‘나중’만 바라보는 독자들에게 애정을 표출하는 것에 시기와 자질이 어디 있느냐고, 마음껏 쓰고 마음껏 떠들라고 대답하는 내가 퍽 우스워졌기 때문이다.
 
영화를 매일같이 보지 않더라도, 고전 명작 영화를 다 보지 않았더라도, 얕은 평밖에 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까? 이 고민에 대한 질문은 무조건 ‘응!’이다. 책을 매일같이 읽지 않고, 고전소설을 전부 읽지 않고, (당사자가 생각하기에) 얕은 평을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그 사람에게 당신은 책 애호가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내가 〈터미네이터3〉를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20대 후반이다. 다시 봐도 열한 살이 이해하기에는 퍽 어려운 영화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려움과 난해함이 내게 영화라는 새로운 세계, 2시간 동안 감독이 만든 미로를 빙빙 돌며 출구를 찾아가는 기쁨을 주었다. 나는 여전히 영화를 꿈꾸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설퍼도 영화를 향한 애정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을 주저하지 않는 마음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면적을 넓혀볼 생각이다.
 
좋아하는 것을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 마음을 비웃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표현해도 될까. 솔직함이 주저되고 좋아하는 것을 숨기는 세상이 아니라, 불합리한 것을 외칠 때 입을 막는 세상이 아니라, 애도의 마음에 불순물을 섞는 세상이 아니라 그 모든 감정을 양껏 누리고 외칠 수 있는 세상이 이제 올 때가 된 것 같다.
 
더 단단해져야 할 것들은 무너지고, 허물어져야 할 것들은 더 높아지는 세상이 다시 옳은 방향으로 키를 돌리는, 흑백 세상처럼 보이는 현실이 꿈과 가능성으로 가득 차기를, 영화의 낭만과 책의 무한함과 간혹 삶 곳곳에 일어나는 기적들이 뒤섞여 그곳이 다채로운 현실이 되는 그런 새해를 바라본다.
 
천선란
1993년생 소설가. 2019년  첫 장편소설 〈무너진 다리〉를 펴낸 후 〈천 개의 파랑〉 〈노랜드〉 〈랑과 나의 사랑〉 등을 펴냈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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