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동 한 켠에 자리한 일러스트레이터 손정민의 하루 || 엘르코리아 (ELLE KOREA)
DECOR

청운동 한 켠에 자리한 일러스트레이터 손정민의 하루

나만의 공간을 둘러싼 익숙하고 편안한 공기

ELLE BY ELLE 2022.11.30
 
나만의 공간을 둘러싼 익숙하고 편안한 공기
‘모든 공간은 가장 사적일 때 은밀한 미학을 드러낸다’는 대목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오랜 이야기가 담긴 물건과 그림이 가득한 공간에 사는 사람으로서 공감이 가는 글이었다. 나는 공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식물과 사람, 공간에 대한 관심을 작업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편안함과 안정감,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은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에 국립현대미술관 근처 건물에서 친구와 작업실을 같이 사용한 적 있다. 당시 불면증이 조금 있었는데 작업실만 오면 마음이 편안하고 낮에도 잠이 쏟아졌다. 깊은 잠을 자고 눈뜨면 시선 전면에 산이 있는 게 좋았다. 결국 이 동네로 이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집과 작업실을 겸할 수 있는 공간을 구했다. 그것이 나만의 작업실로 이어지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청운동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좀 더 후였다. 첫 공간은 오래된 주택의 별채 같은 공간이었다. 서까래가 있어 운치 있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벌레가 많았다. 지금의 공간은 층고가 높고 구조가 독특해서 마음에 들었다. 3년 전, 뉴욕을 여행할 때 그린 포인트에 있는 어느 다큐멘터리 작가의 집에서 에어비앤비로 지낸 적 있었는데, 그녀의 집이 나에게는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림이 벽 한 면에 빼곡히 걸려 있고, 거실 한쪽은 책으로 가득했다. 작은 발코니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는 아침 시간이 좋았다. 나만의 공간을 꾸미면서 그곳의 침실처럼 한 벽은 전부 그림을 걸고, 다른 공간은 여백을 두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짐이 너무 많다 보니 벽은 수납으로 가득 차서 그림 걸 공간 같은 건 사라졌고, 그 외의 공간도 촘촘히 채워졌다. 상상과 현실은 늘 이렇게 극명한 차이가 있다. 특별한 외부 활동이 없으면 온종일 작업실에 있다. 집이 곧 작업실이기 때문에 일과 생활이 모두 한 공간에서 이뤄진다. 작업실을 반드시 따로 둔다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이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분리하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다. 나만의 공간에서는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세라믹 작업을 한다. 반려동물과 주인들이 등장하는 두 번째 책을 준비 중이라 틈틈이 글도 쓴다. 작업물이 마음에 들 때는 행복하고, 작업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손을 놓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다. 요즘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바흐 연주곡을 아침저녁으로 틀어놓으니 좋더라. 하루가 다르게 공기가 차가워지니 빌 에번스도 듣는다.
 
지난여름에 개인전을 무사히 끝내서 조금 홀가분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드로잉 모임을 하고 싶다. 프랑스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는 노년에 선데이 살롱을 열어 젊은 작가들과 작품과 음악, 시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는데, 그녀처럼 그림 외에도 종종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1월에는 지금의 작업실에서 1분 거리인 곳으로 이사 간다. 마땅한 집이 좀처럼 나오지 않던 차에 근처에 살던 지인이 이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복층 구조와 높은 층고, 발코니까지 있는 집이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같은 동네여서 생활 패턴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공간이 전혀 다르니 이후의 삶이 기대된다. 늘 발코니나 마당이 있는 공간을 꿈꿨는데 새로운 공간에는 발코니가 있어서 그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친구들과 맛있는 것도 먹으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한다. 여름에는 햇빛을 잔뜩 받으며 누워 있기도 할 생각이다. 반려식물도 좀 더 규모 있게 키우고 싶다. 얼마 전부터 계속 갖고 싶던, 연보라색 작은 꽃이 피는 꽃나무가 있는데 이사할 때 들여오려고 생각 중이다. 발코니에 걸어가 그 나무를 볼 때마다 행복을 느끼게 되겠지.
 
지금도 집에만 있다시피 하는데 새로운 공간에서는 집과 거의 한 몸이 되면 어쩌나 싶어 걱정되기도 한다. 새로운 공간에서 벌어질 많은 일을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나는 나만의 공간에 진심인 것 같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 때 가장 처음으로 짚어야 할 것은 내 삶의 우선순위다. 내 경우에는 공간 자체도 그렇지만 주변에 공원이나 산 같은 자연환경이 있어서 사계절을 느끼며 산책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자신의 공간이 어떤 동네에 있는지도 삶의 안정감에 큰 영향을 끼친다. 나는 청운동에 오래 머물다 보니 청운도서관이나 사직공원으로 향하는 나만의 산책 코스와 단골집도 생기고 청운동만의 느낌에 익숙해졌다. 일 때문에 번화가에 나갔다가 집에 올 때 광화문 뒤로 산이 보이면 집에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 집, 내 작업실, 나만의 공간에 흐르는 익숙하고 안정된 공기와 분위기. 이제는 그것이 삶의 일부, 아니 전부가 되었다.
 
손정민, 일러스트레이터
집 겸 작업실에 머무는 것이 가장 즐겁고 행복한 청운동 토박이. 사람, 식물, 동물을 즐겨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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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컨트리뷰팅 에디터 정윤주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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