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이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이토록 가늠하지 못한 채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란 부제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라 이 작품에 붙여 마땅합니다. 제목부터 몇 번이고 고쳐 말하게 만드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의 이민자 여성 ‘에블린’은 어느 날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주인공임을 알게 되고, 다중우주의 수많은 ‘나’와 접속하며 그들의 능력을 통해 악당 ‘조부 투바키’에 맞서게 됩니다.
SF 판타지, 쿵푸 액션, B급 코미디에 가족 드라마와 러브 스토리까지 더해진 이 소란하고 기상천외한 영화의 중심에는 양자경(영어 이름 Michelle Yeoh)이 있습니다. 올해 만 60세 생일을 맞이한 양자경은 중국계 말레이시아 출신. 1980~90년대 홍콩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액션 스타로 이름을 알린 그는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007 네버 다이〉 〈와호장룡〉 〈게이샤의 추억〉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 등 작품을 이어가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안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처럼 최근 동양계 배우들이 중심이 된 프로젝트에서 양자경의 존재감과 카리스마는 분량 그 이상의 역할을 했지요.
작품에서 주로 강인하고 위엄 있는 스승 혹은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했던 양자경은 2018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프레스 투어 중에 〈에에올〉 대본을 받았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고, 오직 나를 위해 쓰여진, 마음 깊은 곳에서 늘 기다리던 그런 작품임을 직감했지만 동시에 본인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위험하고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기도 했죠. 결국 두 감독(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의 비전을 이해하고 도전하기로 결심한 양자경은 ‘에블린’이 차이나타운에 있을 법한 아주 평범한 여성처럼 보이길 원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그동안 간과되어온 엄마, 아줌마,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하길” 바랐습니다. 미국 ELLE.com과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동양계 이민자 여성이 슈퍼히어로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본 적 있나요? 에블린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에 충분한 사람이에요.”
피로에 지친 푸석푸석한 얼굴의 에블린부터 멀티버스 속 다양한 버전의 ‘나’로 변신하는 양자경을 보자면 그야말로 이 영화는 ‘양자경의 모든 것’이 담긴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우먼 인 할리우드’ 이슈로 참여한 〈엘르〉 미국 인터뷰에서 그는 요즘 전과 달리 어느 곳에 가든 젊은 팬들이 다가와 말을 건네고 “쿨하다”고 떠받들어 준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버무린 영화는 곱씹게 되는 여러 은유와 상징, 메시지를 남깁니다. 말하자면, 극 속에서 사람들은 평행우주 속 다른 ‘나’와 접속하려면 이상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더더욱 맥락이 안 맞고 이상한 행동을 할수록 더 먼 평행우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설정은 극 속에서 엄청난 코미디를 유발하는 장치이면서 ‘도전’에 대한 메시지를 주기도 하죠. 우주를 위협하는 악당 ‘조부 투바키’가 바로 에블린의 딸 조이와 연결되어 있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때때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수많은 엄마와 딸, 부모와 자식 관계가 겹쳐지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이 비범한 영화가 남기는 가장 큰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 서로에게 다정하자”라는 것. 내가 왜 사는지, 지금까지 이룬 것은 무엇인지, 과거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누구나 이따금 한번씩 이런 질문들이 떠올라 밤잠을 설치거나 여러 날 침잠하기도 합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대는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죠. 그럴 때, 과연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에에올〉의 결말부이자 하이라이트에서 에블린은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던 남편 웨이먼드(배우 키 호이 콴)의 방식대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적들에게 펀치를 가하는 대신 그들의 마음을 달래고 채워주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 구멍’으로부터 마침내 조부 투바키를 구해내고 딸 조이를 향해 외칩니다. “난 너와 여기 있고 싶어!”
인생의 허무를 달래고 서로를 굳건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 마주 잡은 손이라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순간이라는 것. 너와 내가 함께 하는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의미라는 것. 깔깔깔 웃다가 눈물짓고 마는 영화 〈에에올〉에 담긴 이야기를 오래도록 곱씹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