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의 역사를 써내려온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계선'의 창립자, 장충섭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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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의 역사를 써내려온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계선'의 창립자, 장충섭

"한국 공장에서 '놀(Knoll)'의 제품을 제작해 보겠다고 했죠. 놀 사에서 아주 만족했어요."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1965년. 인테리어 회사를 설립하여 반세기 넘게 앞선 스타일과 디자인을 펼쳐온 한국 인테리어 신의 선구자, 장충섭.

이경진 BY 이경진 2022.06.17
 

INTERIOR DESIGNER

CHANG CHOONG SUB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계선’은 1965년 1월 ‘엘리건스 인티어리어스’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올해 57주년을 맞았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 신라호텔, W서울워커힐, 조선팔라스서울강남을 비롯한 유명 호텔부터 분더숍, 10 꼬르소 꼬모 서울, 현대카드 뮤직 & 트래블 라이브러리,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그룹 본사에 이르기까지, 계선의 터치가 가미된 한국의 실내공간은 어떤 시절보다 앞선 스타일과 디자인 감각을 펼쳐왔다. 계선의 창립자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장충섭은 1939년에 태어나 디자인 교육은 물론이고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시절부터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꿈을 키운 눈 밝은 인물. 한국적 맥락에서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수용했다는 관점에서도 의미 있게 언급돼야 할 디자이너이다. 장충섭은 반세기 넘는 세월을 사업가이자 디자이너로  살며 한국의 인테리어 디자인 기틀을 빼곡히 닦아왔다.
 
설해원 골프텔 로비.

설해원 골프텔 로비.

창립 60주년을 향하는 인테리어 회사가 오랫동안 선구적 위치에서, 세계적인 감각을 발휘하며 활약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회사 사람들이 일을 잘한 덕이죠. 제가 욕심 부리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그게 첫째일지도 몰라요. 욕심 안 부리지만 대충 하지는 못하고  뭘 하든 완벽해야 했어요. 힘들게 할 일은 다른 사람보다 며칠 더 힘들게 했어요. 어떤 프로젝트를 맡으면 엄청 공부한 다음 시작했고요.
 
근래에는 “업계에서 1등하겠다는 욕심이 단가를 낮추고, 경쟁을 부추기고 결국 화를 만든다”며 어떻게 하면 매출을 줄일지 고민한 것으로 압니다. 상당히 파격적인 대목이기도 하고 계선의 발전 방향이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떻게 하면 매출을 줄일까 고민하고 있어요.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 갖고 뛰어든 이들이 몇 있었어요. 다들 참지 못하고 그만뒀어요. 돈이 안 되니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돈 버는 데 급급하면 덤핑이니 빚이니 하는 걸 면하기 힘들어요.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가 디자인하고 계선이 시공한 아모레퍼시픽 사옥 내부의 로비 아트리움.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가 디자인하고 계선이 시공한 아모레퍼시픽 사옥 내부의 로비 아트리움.

디자인 교육은 물론이고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대중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시절에 시작한 일이라 선생님의 행보가 더욱 놀랍습니다. 어떻게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됐나요
부모님이 집 리모델링을 즐겨 했어요. 집이 컸는데 항상 뜯어 고치더라고요. 일 년 내내 집 수리 공사를 했어요. 전 그걸 보면서 간혹 그림을 그렸어요. 자연스럽게 재미를 느꼈죠. 형제가 많은데 이 분야에서 일하는 아들은 나 하나뿐이거든요. 아버지는 법관이 되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계선의 시작을 1965년으로 보지만 사실 내 일은 중학교·고등학교 때부터였다고 생각해요. 이미 하고 싶은 분야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선 정말 바탕이 없는 나라였죠. 대학교에도 이렇다 할 전공이 없어서 건축과를 갔어요.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건축학 공부를 하면서도 건축가의 길은 마음속에서 배제했나요
투시도를 그린다거나 건축적으로 배우는 것은 있었어요. 공부하면서도 나는 인테리어 디자인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헌책방에 가는 일이었어요. 상업은행 본점 옆에 미국 군인들이 헌 책을 파는 가게가 있었어요. 거길 가야 인테리어 책이나 매거진을 볼 수 있었죠. 새 책은 아예 없었어요. 수요가 없으니 수입을 안 했겠죠. 그렇게 지내던 시절이 있었으니 내가 이 분야의 1세대인 건 맞아요. 한 번은 학교 밖에서 학과생들과 전시회를 했는데 나는 집이나 건물을 그리기 싫었어요. 그때도 디자인한 가구를 만들어 전시장에 놓았죠. 요즘 말로 하면 ‘홈 바’ 같은 거예요. 술병과 스테레오 컴포넌트 같은 게 다 들어갔어요. 건축 전시회였는데 내 가구가 관객에게 인기 있더라고요.
 
계선이 시공한 오설록 북촌.

계선이 시공한 오설록 북촌.

‘힌지’라는 경첩도 주문 제작해서 사용해야 하는 시대였다지요. 인테리어와 건축, 가구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터득해야 했고요. 당연히 디자인에 비용을 매기고, 값을 받는 것도 불가능했을 텐데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동력은 무엇일까요
디자인 비용이라는 게 그때는 무척 난처한 개념이었죠. 당시엔 나를 모르는 사람이 디자인을 맡기러 오긴 힘들었거든요. 연줄이 닿는 사람과 일했는데, 도면 두 장 그려 주고 돈을 받을 순 없더라고요. 시공까지 해서 납품했죠. 건축 분야는 이미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허가 조건이 있으니 도면을 그리고 비용을 받는 일이 자연스럽지만 디자인 필드는 아니었어요. 인식도 장비도 재료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힌지를 비롯해 집 공사에 필요한 부품이나 자재가 거의 없었어요.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서 오래 했나 싶어요. 환경이 풍족했으면 커리어에 도움이 안 됐을지도  몰라요. 낡은 인테리어 매거진 하나를 사면 뚫어질 때까지 보고 그러니까 깊이 알게 됐죠.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 시절, 군인 신분에서 불에 탄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를 리모델링한 작업이 공식적인 첫 프로젝트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때 고3이었어요. 노먼 드 한(Norman de Hann)이라는 예일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병사를 도와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 일을 했죠. 역시 아무것도 없었어요. 자재도, 유리창도, 조명 기구도 없었어요. 노먼 드 한이 천정에 동그란 다운 라이트를 심고 싶어 했는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각형으로라도 만들어 넣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1965년 첫 사무실을 연 후에 외국 항공사의 티켓 카운터 디자인을 했어요. 당시 한두 곳을 제외하면 모두 선생님의 손을 거쳤죠. 그 다음은 해외 은행사들, 외국계 호텔 체인…. 그렇게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대형 외국 기업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그들 일을 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사무실을 잘 차려두면 세무서에서 나와서 보고 돈 잘 번다며 세금을 많이 징수할까 봐, 누추하게 사무실을 꾸리던 시대였어요. 그런 시대에 무슨 인테리어를 한다고 그랬는지! 당시엔 운도 좋았어요. 아버지 연줄로 아는 분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클라이언트로 만나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보다 쉽게 시작한 건 맞아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가구를 제작하던 미국 ‘놀(Knoll)’ 사의 국내 제작 허가를 받아 최고의 품질로 의자를 제작한 이야기도 초창기 계선에서 빠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1970년대부터 10년간 끈기와 집념으로 생산한 놀의 가구가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어요. 놀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같이 반도호텔 작업을 할 때 노먼 드 한이 놀을 좋아했어요. 매일 나한테 이야기했거든요. 그 이전에 잡지에서 놀을 보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전 지식은 충분했어요. 그때 처음 놀 본사에 전화해서 가구를 들여왔어요. 나라에서 하는 일에 쓴다니까 수입이 되더라고요. 놀 가구의 실물을 처음 봤어요. 이후 미국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2년 8개월 정도 LA 디자인 회사에 다녔어요. 바로 옆에 놀 쇼룸이 있어서 일부러 찾아간 회사였죠.
 
조선팰리스 서울강남그랜드볼룸.

조선팰리스 서울강남그랜드볼룸.

어느 인터뷰에서 놀 사의 가구를 짝사랑처럼 언급했어요
놀 사 사장에게 편지를 썼어요. 한 번 만나고 싶다고. 그렇게 잘 쓴 편지는 아니었는데 일단 요청해서 만났는데 여러 사람에게 소개받고 내가 하는 일도 알려줬더니 제작 상식이 많은 것 같다면서 연례 발표 행사에 저를 불렀어요. 1년에 한 번,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디자인을 제작 지원하는 자리였고 패널리스트로 참석했죠. 가보면 뉴욕 센터 같은 큰 극장에 1000명 정도 모여 있는 거예요. 그 일을 계기로 놀이 한국에 가구를 수출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당시의 한국은 패브릭 1야드도 수입이 금지된 때였어요. 아무리 세금을 많이 내도 안 됐죠. 그래서 한국 공장에서 놀 제품을 제작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놀이 아주 만족했어요.
 
당시 놀이 제작하던 가구의 불완전함을 개선한 제작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제품 완성도에 대한 감각, 디자이너로서 문제해결력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작 성공이 가장 의미 있었던 가구가 있을까요
다이아몬드 체어요. 해리 베르토이아 디자인이었죠. 그런데 내가 좋은 방안을 내서 개선시키더라도 그 기술은 놀의 것으로 가게 돼 있었어요. 그래도 좋은 기회였던 것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 건축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들 각자의 고민을 듣고 결함을 해결해 주고. 다이아몬트 체어는 이미 제품으로 나온 뒤에 결함을 발견했어요. 의자에 앉으면 슬며시 비뚤어지는 거예요. 물론 디자이너에게 보이는 미세한 차이지만 늘 이걸 고민한 거죠. 한국에 그 의자를 가져와 용접 기계 만드는 사람과 연구해 봤어요. 아주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더라고요. 용접하는 시간을 줄여야 했어요. 열 전달하는 시간이 길면 철사가 늘어나기 때문이죠. 미스 반 데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는 당시에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어요. 금속 다리 부분에 무수히 많은 압력을 줘서 탄성을 높여야 했거든요. 엄청난 힘을 가할 장치가 필요한데 한국에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참기름을 짜는 틀을 발견했죠. 거기에 프레스에 걸고 눌러서 탄성을 올리는 작업을 했어요.
 
더현대파크원.

더현대파크원.

계선이 실내 디자인, 가구 사업을 하던 시기에 그래픽 파트에 일할 사람으로 이상철 디자이너를 고용한 것도 흥미로운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디자인이 기능, 제작 기술, 유통, 홍보, 사용 환경을 아우르는 다면적 사고와 도전이 요구되는 분야라는 게 계선의 발자취를 보면 드러나요 선생님께서 생각한  ‘디자인'의 영역과 역할은 분명하면서도 다면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철 씨는 옛날부터 일을 제대로 했어요. 당시에 우리가 달라져야 했던 게 있었는데 식당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간에 이야기를 만들어 줘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그래픽 디자이너가 필요했어요. 사인 그래픽 같은 것도 공들여 만들고 싶었고요.
 
이상철 선생님이 매체를 통해 한 이야기가 있어요. “비즈니스를 하면서 진정한 디자이너로 일생을 산 분은 장충섭 선생님밖에 없다”고요. 어떤 마인드로 사업가이자 디자이너의 삶을 지속했나요
교장 같은 말이지만 ‘나쁜 짓 하지 말라’는 걸 마음속에 새겼으면 좋겠어요. 나쁜 짓 하지 않고 깨끗하게 운영해야 해요. 더 높이, 멀리 가려고 돈도 갖다 주고 이것저것 하며 사업 하는 사람들, 분명히 있지요. 우린 그런 거 안 했어요. 설계하는 직원이나 중간 관리자들이나 직원에게 자주 하는 말이에요. 우리는 정직하게 하자. 정말 정직하게 해왔어요. 대신 어려운 날도 많았죠. 셋방살이도 참 많이 했고. 사무실과 공장까지 합하면 이사만 53번을 다녔으니까요. 지금 사옥은 6년 전에 마련했어요. 거의 11년을 하루도 쉬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어요. 하지만 직원들은 그렇게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평생 아홉 시 반에 자고 두 시에 일어나요. 그런 다음 집에서 출근 전까지 일을 좀 하고 나와요. 그래야 다음날 일이 진행되거든요. 그런 생활 패턴을 2년 전까지 했어요.
 
JW메리어트호텔 서울그랜드볼룸

JW메리어트호텔 서울그랜드볼룸

창업자로서 또 불모지를 개척한 선구자로서 계선의 근래 행보나 인테리어 디자인 업계에 관한 소회가 어떨지 궁금합니다. 그에 연관해 계선에서 도모하고 있는 변화가 있다면
우리 때와 달리 이제는 디자인만 하는 공간 디자인 회사가 많이 생겼어요. 그런 풍토가 자리 잡은 건 다행입니다. 지금 규모가 작은 회사들이 잘하고 있는 게 있어요. 레스토랑 하나를 맡으면 브랜딩부터 하거든요. 우리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 이상철을 발탁한 선택도 그 시절의 ‘브랜딩’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렇네요. 계선이라는 이름이 오래 갔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적응해 가는 회사여야 하겠지요. 이 분야는 너무 빨라서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적응에 실패하면 안 되죠. 한국에선 실패할 조건이 훨씬 더 많긴 하지만요.
 
JW메리어트호텔 서울그랜드볼룸 화장실.

JW메리어트호텔 서울그랜드볼룸 화장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탐구하고 작업해 왔으며, 앞으로도 이를 이어갈 선생님께서 젊은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글쎄요. 좀 엉뚱하게 살아도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얌전히 살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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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이경진
    삽화 숙윤
    사진 이철희
    COURTESY OF KESSON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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