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엔데믹 시대, 파워유성애자는 다시 예전처럼 뜨거운 밤을 꿈꿀 수 있을까?

다시 환락의 월드 비말투어(a.k.a 여름휴가)를 즐길 때가 왔다. 그런데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환락의 월드 비말 투어를 꿈꾸며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걸후드〉를 보며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심장이 울렁였다. 호텔에 들어온 주인공들이 리한나의 ‘Diamonds’에 맞춰 춤추고, 그 모습을 마리엠이 바라보는 장면.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사는 소녀들이 “우린 하늘에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워”라는 노랫말과 함께 춤추는 모습에서 많은 관객이 감동했는데, 나는 그 감동 위로 끼어드는 어떤 세속적 욕망에 휩싸여 수치심을 무릅쓰고 눈물을 흘렸다.
 
“아, 클럽 가고 싶다.”
 
대학시절의 나는 친구들과 여자 넷이서 마드리드 여행을 갔다. 호텔 갈 돈도, 맛집 다닐 돈도 없었던 우리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용돈으로 받은 돈을 모아 방 두 개짜리 집을 한 달간 빌렸다. 밥은 집에서 해 먹고, 마트에서 산 술을 왕창 마신 뒤에 열심히 춤추러 다녔다. 영화 개봉 당시인 2020년 말, 코로나 블루에 허우적대는 무력한 외향인이었던 나는 그날을 떠올리며 정말 울었다.
 
코로나19 시국 전까지는 1년에 어느 정도는 해외에서 일하거나 놀았다. 방송작가인 나에게 힘든 한 시즌을 견딜 수 있었던 명목은 미리 끊어둔 비행기표였다. 파워 유성애자 겸 유성욕자답게 그 안에는 여행지에서의 낯부끄러운 수작질 일정도 간혹 있었다. 휴가철이 시작되는 6월은 참으로 클럽 가기 좋은 달이었다. 챙겨 간 옷을 춤추는 내내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거나 보관함에 맡기고 찾는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되면서 7~8월처럼 미치도록 덥지는 않은 계절. 거기서 신나게 춤추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비말(!)을 나누고, 다음날 숙취에 젖어 ‘신나는 밤이었지’ 하고 추억하던 여행의 순간들. 방콕의 브릭 바, 도쿄의 아게하, 방비엥 사쿠라 바, 파리 센 강 유람선에서 이뤄진 피로연, 덴버와 샌프란시스코의 해피 아워들, 그라나다의 1유로 샷 바, 바르셀로나 해변을 따라 이어진 클럽들과 거기서 만난 사람들. 그중에는 이후 친구가 돼 다음 여행을 함께 한 사람도 있었고, 불같은 하룻밤을 보낸 상대도 있었고, 바에 앉은 채 낯부끄러운 멘트나 주고받다가 퇴근하듯 헤어진 사이도 있었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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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슬슬 다시 시작하는 시점, 누군가 어디로 가고 싶냐 물으면 늘 대답하던 여행지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꼭 성애적 순간이 아니라도 늘 새로운 도시의 사람들과 시간을 즐겨온 나에게 여행지는 결국 도시 자체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였던 것 같다. 동양 여성으로서 아시아 밖을 여행할 때 당연히 불편함은 늘 있었지만, 여행자라는 이유로 적당히 모른 척하고 내가 원하는 휴식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노골적으로 이어진 동양인 공격 관련 뉴스와 출장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굳이 여행자로서 알 필요 없던 도시의 민낯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병원균 취급을 당하고, 우리와 방역에 대한 개념이 다른 현지 클라이언트들을 보며 놀라고, 마스크를 꼼꼼히 쓰는 걸 비꼬는 말도 듣고…. 우한 바이러스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전세계적 질병은 아시아 바깥의 아시아인을 더욱 선명하게 격리시켰다.
 
이전에도 완벽히 안전했던 적은 없지만, 다시 아시아 밖을 여행하는 나는 그 전만큼이라도 안전할 수 있을까? 내 출신지를 두고 주고받는 스몰 토크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는 안전하지만 회의와 냉소의 필터 한 겹이 씌워진 상태로 여행하는 내내 그 전처럼 즐거울 수 있을까. 쏟아지는 불법 촬영과 N번방 사건을 바라보며 남성과의 관계 맺음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피로한데, 이제 나라 밖에서 즐기던 ‘내돈내산’ 휴가마저 오염돼 간다는 사실이 서럽다.
 
일상에서, 휴가지에서, 마음 놓고 욕망을 좇을 날은 우리에게 언제쯤 올까. 공포감과 가치관만으로는 스스로의 행보를 정할 수 없는 ‘유성애자 여행 덕후 여성’으로서의 삶은 늘 잔잔히 억울하다. 길바닥에서 비를 흠뻑 맞으면서 맨발로 춤추고, 혼자서도 어둑한 골목을 걱정 없이 탐험하고, 서로의 동의가 있다면 다른 걱정으로 에너지 낭비할 필요 없이 신나게 섹스하고 싶다. 운동화 속에 작은 자갈 하나 든 것처럼 걷는 내내 내가 누구인지 매일 확인하지 않고도 내 욕망대로 지내고 싶다. 세계 일주 중인 백인 남성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올려놓은 광란의 만취 파티 셀카를 보며 조용히 읊조린다.
 
“아, 나도 여행 가고 싶다. 얘처럼 막 가고 싶다. 깨 벗고 춤추고 싶다.”
 
시대가 선물한 온갖 역경 덕에 여행에 나서는 것마저 투쟁으로 느껴지는 나날을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나가고 싶은 자신을 피곤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늘 욕망이 피로감을 이기는 순간들이 삶을 결정해 왔음을 안다. 생각해 보면 직업도 사랑도 그렇게 해왔으니까. 팬데믹이 일상을 재구성했듯, 우리의 여행도 이전과는 달라질 테다. 그래도 꿈은 꾸자. ‘내 이것만 끝내면 반드시 기어나간다’는 꿈은 간직하고 살자. 내가 움츠러드는 대신 세상이 나의 놀 권리에 나만큼 진심이 돼주길 기대하며.
집 나가면 개고생, 그래도 나갈 거다.
 
곽민지 다양한 비혼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예능 팟캐스트 〈비혼세〉 진행자이자 출판 레이블 ‘아말페’ 대표. 〈걸어서 환장 속으로〉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를 썼다. 여성의 몸과 사랑, 관계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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