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의 단톡방에서 벌어진 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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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단톡방에서 벌어진 일

단톡방에서의 그는 내가 알던 완벽한 남자가 아니었다. 저질스러운 농담과 유아적 비난, 때로는 위험 수위의 무언가가 오갔다

ELLE BY ELLE 2019.05.12


새벽 3시가 넘어가는 시간, 친구 A가 다급하게 전화 한 통을 걸어왔다.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집 앞에 찾아와 난동을 부린다는 SOS 콜이었다. 이미 A는 시도 때도 없는 전화와 욕설 문자에 진절머리를 치다 그를 차단한 상태였는데, 그렇게 연락을 싹 무시했더니 한밤중에 집 앞으로 찾아와 창문에 돌을 던졌다는 거다. 그러고도 모자라 술에 잔뜩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안 만나주면 네 영상이랑 사진 인터넷에 뿌려버릴 거야!” 얼마 전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연예인 단톡방 불법 촬영 영상 유포 사건’을 보면서 난 그 친구를 떠올렸다. A가 얼마나 공포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는지, 그놈의 스마트폰을 빼앗기 위해 어떤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 말이다. 그의 스마트폰을 산산조각 낸 후에도 A는 한동안 그가 이미 몇몇에게 특정 영상과 사진을 전송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진짜 놀라운 사실은 그가 헤어지기 전까지는 완벽한 남자친구였다는 거다. 로맨틱하고 유머러스하며 A밖에 모르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라며 우리는 A를 부러워했다. A가 그놈의 실체를 알게 된 건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수상한 카톡이 자꾸 오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인 참에 그가 남자들만 모여 있는 단톡방에 다른 여자들과 스키장에 놀러 갔다 왔다며 ‘원 나잇’ 운운한 걸 발견했다. 마치 해리성 인격장애 환자마냥 다정하던 남자가 단톡방에서는 자신의 여성편력을 과시하는 역겨운 타입으로 돌변했다고. 물론 그는 A뿐이라며 끝까지 잡아뗐고 친구 앞에서 허세 좀 부리고 싶었다고 변명했다. A는 그게 더 싫었다고 털어놨다. 친구 앞에서 센 척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게 사실이라면, 인간적으로 더 형편없이 느껴졌다는 거다. 흔한 일이다. 남자친구가 단체 카톡방에서 야동 링크를 공유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거나(개인적으로 섹스와 자위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끔찍한 잡담, 이를테면 “요즘 여자친구가 살찐 것 같다. 그래서 하기 싫다”(말할 가치도 없다)와 같은 이야기를 해대는 모습에 이별을 결심했다는 케이스를 한 타래쯤 안다. 단톡방 밖에서는 무해하기 그지없던 남자들이 동성 친구 앞에서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마초로 변해 있었다는 우리 세대의 도시 괴담들. 이건 만국 공통의 이슈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 외국인 친구가 ‘Banter’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적이 있다. 그는 ‘Banter’가 ‘영어의 암내’ 같은 거라며 서로를 놀릴 때 쓰는 저속하고 모욕적인 말과 방식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 앞에서 내가 ‘Banter’한다면 평생 예의 같은 건 기대하지도 말라는 무서운 소리를 해대면서 말이다. 뭐지? 분명 네이버 사전에는 ‘가벼운 농담’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미간을 잔뜩 찌푸린 내 표정을 보고 그가 이렇게 덧붙였다. “왓츠앱 총각 파티 그룹 메시지 창에서 오가는 말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게 ‘Banter’야.”

도대체 남자들의 단톡방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주변 남자에게 단톡방의 쓰임새에 대해 물었다. 일단 욕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순진한 내 남자친구부터. “응. 나도 남자끼리 하는 단톡방 있지.” 그는 이상하게 말을 아꼈다. 여성 패션 잡지 에디터라는 직업적 특성상 나보다 더 여자 사람 친구가 많은 남자 에디터 Y는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말했다. “내 단톡방은 다 여자 아니면 남녀 섞여 있어. 그런데 간혹 남자 단톡방을 보면 수위가 세긴 하더라. 왜 지방에 가서 나도 모르게 사투리를 섞게 되잖아. 하도 마초적인 언어들이 오가니까 자연스럽게 모방해서 쓰는 것 같아.” 또 다른 친구는 한 마디로 답했다. “매 초가 포르노 아니면 뽀로로야.” 야하거나 유치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대부분 자세한 답변을 회피하던 차, 내가 아는 남자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성생활을 떳떳하게 즐기는, 일종의 ‘남자들의 남자’인 M이 몇 개의 메시지를 포워드해 주었다. 왜 다들 말을 짧게 했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차마 옮겨 적을 수 없는 저질스러운 농담과 다분히 유아적이라고 느껴지는 ‘짤’들이 주를 이뤘다. 이를테면 멀쩡해 보이지만 플레이하면 갑자기 신음소리가 나온다든가 마지막 즈음에는 뜬금없이 페니스나 여성의 나체가 등장하는 실없는 영상 말이다. “뭐, 야한 얘기 많이 하지. 축구나 야구, 농구에 대해서 말할 때도 있고 쓸데없는 개그 영상 같은 거 보내고 술 먹는 얘길 하거나…. 주로 서로 욕해.” M의 말에 따르면 단톡방에서도 일종의 역할이 있다고 했다. 야한 영상을 공유하는 사람, 저질 농담을 하는 사람, 술 먹자고 하는 사람, 게임 얘기를 하는 사람, 스포츠 얘기를 하는 사람 등이 정해져 있다는 거다. 그리고 앞서 얘기한 주제를 제외한 여타의 근황 토크는 화자 불문하고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무시 혹은 비난. 진지함은 1도 없었다. 이건 채팅이 아니라 게시판에 가까웠고 성인의 대화라고 믿기 어려웠다. M이 덧붙였다. “그러게, 내가 남자한테 정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옳다는 건 아닌데, 이게 현실이야.”

솔직히 말해 내 단톡방도 그리 떳떳한 것은 아니다. 물론 성격은 좀 다르지만 말이다. 그 차이는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서 연인 사이인 로스와 레이첼이 다투는 장면 중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와 골드 비키니’ 에피소드에서, 로스는 레이첼에게 어떻게 자신의 성적 판타지(레아 공주)를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냐며 따진다. 그건 둘만의 은밀한 사생활이라는 거다. “피비는 내 친구인데? 남자들도 로커 룸에서 그런 걸 다 공유하는 건 마찬가지잖아”라는 레이첼의 말에 로스는 이렇게 답한다. “그건 달라. 누가 스트리퍼와 데이트했다거나 카 섹스를 했다는 종류의 이야기라고!” 뭐, 그런 거다. 우리도 단톡방에서 헛소리를 하고 거침없이 욕하며 야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포르노나 남자의 누드 사진을 주고받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의 수위는 결코 약하지 않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여자들의 단톡방은 보다 개인적이고 일상적이며 경험에 기반하는 편이다. 내 단톡방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남자친구는 무탈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관계에 대한 고민, 데이비드 보위가 아니라 아이돌 노래로 가득 찬 플레이리스트, 짐 자무시 말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열광하는 영화 취향 그리고 어젯밤에 대한 솔직하고 사소한 생각들…. 그러니까, 내가 남자친구에게 정말 들키고 싶지 않은 건 진짜 100%의 나인 것이다. 요지는 누구에게나 연애의 페르소나가 있다는 거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 연인에게 완벽하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건 거짓말이나 가짜가 아니라 살다 보면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사회생활의 기술이자 생존 본능에 가깝다. 연인으로서의 나, 친구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서의 나, 자식 혹은 부모로서의 나는 본래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법 아닌가. 그리고 막역한 동성 친구들과의 단톡방이란 가장 손쉽게 밑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장소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단체 카톡방에서 연인을 조롱거리로 삼거나 영상을 게시했던 그놈들도 페르소나로 해석될 수 있는 거냐고? 대답은 M의 마지막 코멘트로 대신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선이라는 게 있지. 사적인 영상이나 사진을 공유하거나 여자친구로 농담하지는 말아야지. 당연한 거 아냐? 쓰레기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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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일러스트레이터 김란
    글 김희민
    에디터 김아름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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