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셔너블한 공간의 미학! || 엘르코리아 (ELLE KOREA)
DECOR

패셔너블한 공간의 미학!

천편일률적인 유행, 쏟아지는 신상품 속에서 패션 디자이너는 어떻게 자기 옷에 특별한 개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ELLE BY ELLE 2013.12.20

 

해답은 어쩌면 옷 자체가 아닌 ‘공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만리장성. 해발 1000m의 가파른 절벽 위의 고성에 암전과 함께 유로트랜스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2000여 년 동안 침략과 방어, 노역과 살육의 현장이었던 장성의 보도가 드레스와 모피를 두른 88명의 톱 모델이 행진하는 화려한 융단으로 변신했다. 지난 2007년 10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펜디 쇼 이야기다. 철옹성 같은 중국 행정 당국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부터 어마어마한 짐을 어떻게 옮겼는지 등등,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쇼는 패션계의 불가사의로 남았다.


패션쇼의 ‘특별한’ 현장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소수의 관계자나 VIP만이 하이패션을 누렸기에 보통 부티크에서 쇼를 치르던 1970년대에도 몇몇 디자이너들은 옷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무대 연출을 다양하게 고민했다. 쇼가 점점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은 기상천외한 장소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살벌한 경쟁이 시작된다. 정식 개관도 하지 않은 신축 건물이 쇼장으로 첫선을 보이는 건 물론이요, 지하철, 체육관, 카바레, 공장, 승마장, 궁전, 자동차 전시장 등 생각지도 못한 공간이 하루 동안 놀라운 변신을 한다. 때로는 모두가 알고 있는 뻔한 장소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충격적인 변신을 할 때도 있다.

 

2012년 S/S 시즌, 루이 비통이 동화 같은 회전목마를 가져다 놓은 곳이 관광객이 북적이던 루브르박물관 광장이었다는 것을, 사진만 보고는 그 누구도 맞출 수 없었다. 환상적인 장소를 찾아냈더라도 본격적인 무대 연출은 시작도 안 했다. 진짜 중요한 건 ‘텅 빈 공간’에 무한한 상상력을 불어넣어 디자이너가 창조해 낼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창세기의 조물주처럼 빛과 어둠의 구역을 가르고 육지와 물과 생명의 메타포를 생성하고 그 사이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터주는 신(神)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설령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패션쇼라 해도 결과물은 늘 천양지차다. 샤넬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만국박람회장 ‘그랑 팔레’는 소니아 리키엘H&M의 캡슐 컬렉션을 선보일 때 온갖 과장된 즐거움이 넘치는 서커스장이 돼 있었다. 샤넬 쇼를 자주 가본 사람도 그곳이 그랑 팔레인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랑 팔레를 가장 폭넓게 활용해 온 샤넬의 상상력은 매번 놀랍다. 북극에서 진짜 빙산을 공수해 실내 전체를 툰드라 지대로 바꾸어놓는가 하면(2010 F/W), 캉봉 가의 샤넬 매장이 쑥 들어와 있기도 한다(2008년 F/W). 인도의 화려한 성에서 대접하는 만찬 테이블에 초대한 적도 있고(2012년 pre-fall) 커다란 산호와 수초가 가득한 심해 세계로 관객을 이끌 때도 있다(2012년 S/S). 이런 다채로운 연출을 가능케 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남자 칼 라거펠트의 영감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 비전을 공간 안에 구현하는 무대연출가 스테판 루브리나(Stefan Lubrina)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만큼 용감해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영화계에서 일하다가 20여 년 전 라거펠트의 오른팔로 합류한 루브리나는 공간 연출에서부터 소품 선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책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넬의 루브리나는 좀 특별한 경우고,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쇼 무대 연출을 위한 디렉터를 내부에 두지 않는다. 대신 유능한 무대연출가와 손을 잡는다. 루이 비통은 패션 이벤트의 귀재 올리비에 마사르(Olivier Massart)와 오랜 파트너십을 이어왔고, 존 갈리아노크리스챤 디올 시절에 영화 세트 제작으로 이름을 날리던 마이클 하웰스(Michael Howells)에게 상당 부분 의존했다. 아름답고도 기괴한 갈리아노와 하웰스의 합작품 중에서 압권은 콜리지의 낭만시로부터 영감을 받은 2008년 F/W 시즌 갈리아노 쇼로, 쿠빌라이 칸의 황금 정원을 옮겨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신비롭고 이국적이었다.

 


장식과 과장의 끝을 달렸던 갈리아노와는 달리 미우치아 프라다가 오랜 친구 렘 쿨하스와 함께 건설한 비전은 기호와 상징으로 압축된 가상현실이다. 쿨하스는 근 10년간 프라다의 모든 패션쇼 무대를 책임져 왔는데, 2013년에 이르러서는 주객이 전도된 듯 무대장치가 패션을 압도하는 상황이 됐다. 캣워크 뒤에 꾸민 거실에 쿨하스가 가구 브랜드 놀(Knoll)과 합작해서 만든 12점의 가구 연작 ‘생활의 도구(Tools for Life)’가 배치됐는데 빔 프로젝터가 쏘아 올린 창문 밖의 극도로 사실적인 풍경 탓일까,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호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밀란 가구박람회에도 정식으로 출품된 가구들은 (프라다와 상관 없는) 쿨하스의 작품이었지만 프라다는 광고에까지 쿨하스의 가구를 등장시킴으로써 패션쇼와의 개연성을 이어나갔다. 쇼가 단순히 1회성 이벤트로 그친 것이 아니라, 무대로부터의 영감이 광고와 다른 비주얼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단언컨대 패션쇼는 단순히 새 옷을 선보이는 자리라기 보다 15분으로 응축된 화려한 종합예술이다. 무대장치, 음악, 조명, 모델의 연기, 설치미술과 장식을 통해 옷은 단순한 상품을 넘어서 특정한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갖게 되고, 마침내 사람들은 새 옷을 사 입고 싶은 근거를 얻는다. 요즘 패션 디자이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혹은 ‘아트 디렉터(Art Director)’로 부르는 경우가 잦은 이유도 의상뿐 아니라 광고기획, 매장의 컨셉트와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비주얼과 관련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관된 그리고 강력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권한과 의무를 함께 갖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컬렉션을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인 쇼는 ‘장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행사이자, 디렉터의 다변적인 창의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험 무대다.  트로이 전쟁보다 격렬한 창의력 경쟁 속에서 수십 년간 스펙터클과 어드벤처가 난무해 온 쇼장, 이곳에서 패션 버전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쓰여지고 있다.

 

who’s she 글쓴이 조유리는 <바자>, <더 스타일>, <w>등의 잡지에서 패션 에디터로 활동하며 수 년간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를 매의 눈으로 지켜봐왔다. 현재는 그간의 방대한 경험을 노하우 삼아 패션 컨텐츠를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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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이경은
    WRITER 조유리
    PHOTO GETTYIMAGE, 멀티비츠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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