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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미술관

서울은 지금 거리마다 예술이다. 석유비축기지와 화력발전소, 지하 벙커 등 지난 20세기의 의미심장한 유산들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중이다::서울,시티가이드,미술관,공공미술,엘르데코,엘르,elle.co.kr::

프로필 by ELLE 2017.10.08

만리동 광장에 설치된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



6개의 탱크가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한 마포의 문화비축기지.



10월 21일 ‘SeMA 벙커’라는 이름으로 개관할 여의도 지하 벙커.



동네에 제법 볼거리가 생겼다. 북한산 우이동과 신설동을 잇는 경전철 우이신설선이 개통된 9월 2일, 성신여대입구역 에스컬레이터 앞엔 성형외과 광고 대신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의 작품이 걸렸다. 문화 철도를 표방하는 우이신설선의 역사는 앞으로 약 6개월간 미술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서울 시내 150곳의 버스정류장과 택시 승차대 광고 게시판을 갤러리로 삼은 ‘서울아트스테이션’ 프로젝트도 같은 날 시작됐다. 요즘 을지로 3가 택시 승차대에선 밤마다 백남준의 ‘TV 부처’가 빛난다. 


서울 시는 2016년부터 도시 공간에 예술적 상상력과 인간적 정취를 불어넣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을 추진해 왔다. 옛 서울역 고가도로를 재생한 ‘서울로 7017’의 끝 지점과 연결되는 만리동 광장에 설치된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건축사무소 SoA의 강예린 소장이 완성한 반경 25m의 노천 무대는 햇빛이나 달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순우리말 ‘윤슬’ 그대로 아름답게 일렁인다. 만리동의 풍경과 하늘을 담은 거울 지붕 아래, 4m 깊이의 공간은 2800개의 원형 계단으로 연결돼 있고 관객은 물속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9월부터 10월 말까지 이곳에서는 팩토리와 강예린의 공동기획으로 ‘윤슬 사용법’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가 진행 중이다.


2005년 서울 여의도 환승센터 공사 중 발견된 의문의 벙커도 새 단장을 거의 끝낸 상태다. 약 200평 규모의 이 지하 벙커는 비밀투성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국군의 날 행사 때 쓰인 정부 주요 인사들의 대피용 방공호로 추정되나, 정확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1977년 항공 사진에 입구의 철문이 처음 포착됐을 뿐이다. 발견 당시 벙커에는 샤워실과 소파 등을 갖춘 VIP실과 지휘대가 있었던 공간과 화장실, 기계실 등이 발견됐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 비밀 기지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을 맡아 10월 21일 ‘SeMA 벙커’라는 명칭으로 개관식을 갖는다. VIP실은 역사 갤러리로 상설 개방되며 다른 공간에서는 기획전이 열린다.


버려져 있던 마포 석유비축기지는 최근 문화비축기지로 재탄생했다. 1973년 중동전쟁으로 인한 1차 석유파동 이후 비상사태를 대비해 구축된 이 석유비축기지는 1급 보안 시설로 41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돼 왔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이 완공된 후, 위험시설로 분류돼 ‘2002 한·일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차갑게 잊혀졌다. 2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9월에 공개된 문화비축기지는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6개의 탱크와 야외 무대로 구성돼 있다. 축구장 22개 규모라는 이 거대한 문화 마당에서는 서커스 공연과 음악축제, 거리예술마켓이 열린다. 매봉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엔 소나무와 잦나무, 상수리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송유관 등 석유비축기지가 조성된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탱크에서는 투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일부 탱크는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도 활용된다. 문화비축기지 맞은편엔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월드컵 공원이 있다. 양화대교를 건너면 수돗물 정수장 시설을 재활용한 선유도 공원까지 동선이 이어진다.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타운으로 한때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세운상가는 전자 상업의 메카에서 기술과 예술 사이를 오가는 창작자들의 상상력 발전소로 진화 중이다.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공원과 광장이 조성되고, 대림상가와 삼풍상가를 잇는 공중 데크가 부활한 가운데, 창업 공간 ‘세운 메이커스 큐브’가 들어섰다. 비어 있던 아세아상가 3층엔 청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공간이 조성됐고, 지하 보일러실은 이들을 위한 라운지로 변신했다. 종묘에서 세운상가를 통과해 남산까지 이어지는 공중보행로와 옥상 쉼터 설치도 예정돼 있다. 또 다른 근대 산업유산인 당인리발전소 역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은방울자매의 60년대 히트곡 ‘마포종점’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했던 이 화력 발전소는 1930년 옛 마포나루터 부근에 세워진 국내 1호 발전소다. 기존의 화력 설비가 완전히 지하로 내려가는 2018년부터 원래의 화력 4·5호기가 있던 자리엔 인근의 홍대 문화와 연계한 예술 창작 공간과 공원이 생겨날 예정이다.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한 템스 강변의 테이트 모던처럼 말이다. 한강의 기적을 알리던 발전소 굴뚝에선 이제 문화의 향기가 피어 오를 것이다. 익숙했던 일상 풍경은 멋진 예술 작품이 되고, 잊혀져 가던 추억의 공간들은 다시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온다. 지금 서울은 거리마다 예술이다.

Credit

  • 글 이미혜
  • 에디터 채은미
  • 디자인 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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