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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6. SAT

Far Far Away 스코틀랜드의 마법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조금 더 멀리,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의 모든 것에 흠뻑 취해 주문처럼 외쳤다. 슬란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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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런던 찍고, 에든버러로  데려다준 영국항공의 보잉 787 드림라이너. 비행 중 기체가 흔들릴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데 이번 여행은 심신이 편안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도보 여행길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에는 소박한 품위를 지닌 전원 마을 드리멘(Drymen)이 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마실 땐 이렇게 외쳐라. 슬란지바!



    하이랜드 지역의 글렌고인 증류소에서 제조 과정을 탐방하고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위스키를 만들었다.




    불멸의 전사 ‘하이랜더’처럼 세월의 풍파를 묵묵히 견뎌낸 에든버러 성은 스코틀랜드 역사의 산증인이다.



    매킨토시가 설계한 글래스고 예술학교. 2년 전 화재로 인해 지금은 복구 작업 중이다.




    영국 런던의 히드로공항.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의 승객들은 둘로 나뉘었다. 열에 여덟은 입국심사장으로, 나를 포함한 소수의 일행은 환승 구역으로. 런던은 내게 종착지가 아니었다. 이곳을 경유해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로 가는 길. 비행기로 1시간을 가면 에든버러다. 가깝다면 가깝지만, 마음의 거리는 다르다. 런던을 끼고 이야기하면 에든버러는 쉽게 닿을 수 없는 먼 곳처럼 느껴진다. ‘런던 다녀왔어’ ‘스코틀랜드 다녀왔어’ 어느 한쪽의 반응이 큰 것도 그런 이유다. 스코틀랜드란 단어에는 어떤 동경이 담겨 있다. 그걸 좇아 좀 더 먼 곳으로 떠났다. 5월의 끝자락, 에든버러에는 삭풍이 날을 세웠다. 가끔 햇볕을 장전하기도 했지만 찬 공기에 금방 마모됐다. 구시가지인 로열 마일(Royal Mile)을 걸었다. 이방인에게 공기는 더 차갑게 다가왔다. 수세기 전의 이맘때도 그랬겠지. 과거에는 왕족과 귀족만이 다니던 길이었다. 로열 마일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에든버러 내에서도 수세기의 역사가 옹골게 버티고 서 있다. 어디를 걷든 역사의 편린들이 발등에 쌓였다. 나이를 세기에도 고단해 보일 만큼 오래된 건물들은 여전히 당당하고, 기품을 잃지 않았다. 나이테를 더할수록 아름다워지는 나무들처럼. 한 호흡으로 긴 숨을 쉬고 있는 에든버러에선 낡은 것을 떠나 보내는 현대 도시의 허세가 유치해 보였다. 삶이란 최선을 다해 늙어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이 도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에든버러에 온 사람들은 성에 오른다. 아니, 역사를 오른다. 깎아지른 화산암 절벽 위의 에든버러 성. 왕실의 거처이자 요새였던 성의 축조 과정에는 세월이 겹겹이 쌓여 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티격태격하길 시계추처럼 반복했다. 그때마다 에든버러 성은 부러지고 박살 난 상처를 붙이며 억세게 버텼다. 적군이 아니라 쉬지 않고 폭력을 배설해 온 인간의 본성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에딘버러 성 꼭대기에 오르자 시가지가 넓고 편안하게 내려다보였다. 성이 간직한 긴 사연을 듣고 난 직후라 아래 세상은 더 평화롭고 살 만해 보였다. 과거의 슬픔과 비명은 수만 번의 밤과 함께 다 씻겨진 상태였다. 저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괜한 낭만에 빠진 나 같은 여행자처럼 그들도 굳센 성을 올려보며 ‘끝까지 살아보자’라고 다짐할까.


    에든버러에서 이틀을 보내고 도시를 옮겼다. 정주와는 거리가 먼 여행자에게 변덕스러움은 무죄다. 차로 1시간 거리에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인 글래스고가 있었다. 사람도 많고 현대적인 건축물도 시야에 자주 걸렸다. 글래스고의 역사는 에든버러와 다른 의미로 치열했다. 무역업으로 기반을 닦은 이곳은 산업혁명과 맞물려 번성기를 누렸다. 철강과 조선업의 요충지였고 돈과 사람이 넘쳐났다. 인류 역사에서 영원한 상승 곡선은 없다. 이후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도시는 생기와 풍요를 잃었다. 하지만 글래스고는 흐릿한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산업도시는 우아한 변신을 도모했다. 예술과 문화로 전공을 바꿔 여전히 36.5도의 뜨거운 생동을 유지하고 있다. 침체를 극복하고 불멸의 시를 쓴 글래스고의 거리는 색채미가 선연했다. 미술관과 박물관,  갤러리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 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은 켈빈그로브 아트 갤러리 앤 뮤지엄(Kelvingrove Art Gallery and Museum)을 찾았다. 글래스고를 대표하는 미술관 겸 박물관으로 중세미술 작품부터 자연사, 고고학 등 다양한 전시가 이뤄지고 있었다. 바쁜 걸음을 멈추고 오래 본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의 1951년 작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미술관에서 직접 작가에게 구입한 작품이라고 했다. 초현실주의자가 그린 종교화라니. 달리의 작품을 스코틀랜드에서 보게 될 줄이야. 어느 쪽이 됐든 오래 기억될 사건이었다. 그래서 왠지 억울했다. 훗날 글래스고 여행을 추억할 때 달리의 긴 콧수염이 먼저 떠오르는 건 아닐까 하고.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매킨토시는 스코틀랜드의 걸출한 건축가 겸 디자이너이다. 20세기 초반, 천편일률적인 건축디자인에 식물 모티프의 유려한 곡선 양식을 적용해 화려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글래스고 토박이였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글래스고 미술대학에 다녔다. 1909년에는 글래스고 예술학교를 설계했다. 현대건축사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위대한 건축물을 고향에 선물했다. 이러이러해서 매킨토시가 살바도르 달리보다 글래스고의 추억에 적합하다는 얘기다. 매킨토시는 현존하지 않지만 도시 곳곳에 그의 업적과 천재성이 단단하게 뿌리 박고 있다. 이를 알현하기 위해 전 세계 건축학도들이 ‘매킨토시의 도시’를 찾는다. 열이면 열, 그들 모두가 알현하는 윌로 티룸(Willow Tearoom)을 방문했다. 약 100년 전 매킨토시가 디자인한 찻집으로 가구며 인테리어며 매킨토시의 인장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치 그의 비전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주문한 애프터눈 티가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외쳤다. 슬란지바(Sla′inte Mhath)!


    슬란지바는 스코틀랜드 언어로 ‘건강을 위하여’란 뜻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 하나다. 이 말이 거침없이 돌고 도는 곳은 펍이다. 사람들은 데시벨을 높여 소리친다. 슬란지바! 그러니까 이건 건배사다. 스코틀랜드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말도, 가장 많이 쓴 말도 ‘슬란지바’였다. 에든버러 사람들만 아는 맛집 ‘그레인 스토어(Grain Store)’에서 풍요로운 첫 식사를 할 때부터, 미식 가이드와 함께 에든버러 먹방 투어를 할 때도, 드리멘(Drymen)이란 작은 마을에서 발견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펍 ‘클라첸 인(The Clachan Inn)’에서도, 영드 <다운튼 애비>의 촬영지로 유명한 인바레이어 캐슬을 구경하고 들린 시푸드 레스토랑에서도, 하이랜드 지역에 있는 싱글 몰트 위스키를 생산하는 글렌고인 증류소에서 투어를 하면서도 와인이든 위스키든 맥주든 술이 빠지지 않았다. 삼시세끼 동안 ‘슬란지바’란 말이 입에 쫙쫙 붙다 보니 술이 아닌 뭔가를 마실 때도 그냥 슬란지바. 어쩌면 이번 여정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경쾌하고 순조로웠던 건 약간의 취기가 나를 도취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술과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으니까. 


    물론 스코틀랜드의 서정성은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눈부셨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의 공통점은 도심을 빠져나오면 금세 ‘산 넘어 산’ 풍경이 펼쳐진다는 것. 그 길을 따라가다 만난 로몬드 호수의 전원 마을인 러스(Luss)는 아름다운 적막함이 감돌았고, 화평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호수를 마주한 언덕 위 포트넬란 농장(Portnellan Farm)에선 광막한 초원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해 봤고, 사람 좋은 농장주와 보트 투어를 하는 동안에는 잘 익은 바람을 어루만졌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목가적 풍경에 무방비 상태가 되자 스코틀랜드의 서정은 가슴에 스며들어 여운이 됐다. 여정이 여운이 되는 곳, 좋은 여행은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을 선물한다.



    features editor KIM YOUNG JAE

    여행지에서 느긋함은 사치. 눈 뜨면 나가고, 잠자기 전까지 부지런히 발품을 판다. 그래야 남는 여행이지. 밤 11시가 돼야 하늘이 컴컴해지고 새벽 3시에 동이 트는 스코틀랜드야말로 이상적인 여행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