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Y

<엘르 데코>가 찾은 아름다운 일터 - 비트라 캠퍼스

비트라는 본사이자 공장이자 뮤지엄인 이 공간에 ‘캠퍼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학구적이라 느껴질 만큼 디자인에 관한 순수성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비트라,비트라 캠퍼스,가구,뮤지엄,오피스,오피스 인테리어,인테리어,데코,엘르데코,엘르,elle.co.kr::

프로필 by ELLE 2016.02.17

가구에 대단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임스의 라운지 체어 정도는 들어봤으리라. 찰스 & 레이 임스 부부 외에도 장 프루베, 프랭크 게리, 이사무 노구치, 베르너 펜톤, 부홀렉 형제, 론 아라드 등 쟁쟁한 이름의 디자이너들과 희대에 남을 디자인 제품을 생산한 브랜드이자, 헬라 융게리우스, 에드워드 바버 & 제이 오스거비 등 떠오르는 디자이너들과 실험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꾸준히 창조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디자인 선구자, 비트라 이야기를 하려 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바젤에서 20분 정도 차를 타고 들어가면 바일 암 라인(Weil am Rhein)이란 소도시가 나온다. 여기 비트라 디자인 제품 대부분을 생산하는 공장부터 지금까지 만든 모든 디자인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하우스 그리고 브랜드 역사를 세세하게 기록한 뮤지엄까지 한 곳에 모은 ‘비트라 캠퍼스’가 있다. 이 자리는 원래  50년대부터 비트라 공장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1981년 엄청난 화재로 모든 건물이 불탔다. 비극은 비트라 창업주의 아들이자 현재 CEO인 롤프 펜바움(Rolf Fehlbaum)에 의해 터닝 포인트로 바뀌었다. 여기까지가 비트라 리퍼블릭 수준으로 거대한 규모의 어마어마한 건축물, 인류 역사의 근현대 디자인 역사를 말할 때 반드시 기억될 수많은 유산들을 그 안에 가득 채운 비트라 캠퍼스의 탄생기다. 아다시피, 비트라를 포함한 대규모 디자인 브랜드는 자체 디자인만 생산하지는 않는다. 세계 각국의 여러 디자이너들과의 협업(현실적으로 표현하면 계약)을 통해 디자이너의 프로토타입을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들의 자유로운 창조 정신이 브랜드의 멋진 서포트를 통해 세상에 공유되는 셈인데, 이 멋진 콜라주는 실제로 비트라 캠퍼스 내에 다양한 모습으로 깃들어 있다. 이 놀라운 공간을 <엘르 데코> 코리아가 직접 찾아갔다.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곳이자, 비트라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브레인들의 오피스까지 샅샅이 취재했다.


비트라 캠퍼스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아마도 미국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지어 올린 비트라 뮤지엄일 것이다. 아니, 오직 기하하적 사선으로만 이뤄져 지금의 자하 하디드란 유명세를 만든 구 소방서(현재는 이벤트와 컨퍼런스 홀로 쓰인다) 건물일지도 모른다. 잠깐, 일본 출신인 안도 타다오의 첫 유럽 진출작이자 건물 주변의 나무를 단 한 그루도 자르지 않고 완성한 컨퍼런스 파빌리온이려나.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특유의 흐느적거림을 표현한 공장 건물, 어쩌면 일본 건축가 듀오 사나(Sanna, 세지마 가즈요 & 니시자와 류에)가 인근 지역 주민을 배려해 나지막이 지은 또 다른 공장 건물? 장 프루베가 지은 주유소(지금은 전시장으로 쓴다), 렌초 피아노가 디자인한 1인용 하우스….  애초에 대표 건물을 꼽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바보짓일지도 모를 만큼 캠퍼스 내에는 모든 건축물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어느 것 하나 건축사적으로 놀랍지 않을 건물이 없는 이곳에서 ‘디자인 덕후’들은 정신을 잃고 만다. 건물들은 모두 디자이너들의 주요 작품과 신작이 전시돼 있고, 대부분 일반인에게 공개돼 있다. 다양한 투어 프로그램이 있어서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과 디자이너들로 늘 북적이지만 도심 한복판 유명 관광지처럼 산만하지 않고, 한적한 시골마을에 온 듯 유유자적 건물들을 돌아볼 수 있다. 작디작은 독일의 시골마을까지 건축이나 디자인 종사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반드시 찾아가고 싶도록 만드는 힘은 뭘까. 어디 자랑하고 보여주기 위한 얕은 의도가 아니라, 비트라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모든 아름다움을 여기 모아두겠다는 지나치게 순수한 의지와 그 사랑을 전폭적으로 뒷받침할 넉넉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넓은 부지에 띄엄띄엄 지은 건물 사이로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이 공존하는 모습은 건축물들의 유토피아에 거의 도달한 듯하고, 그 안을 채운 아이코닉한 디자인 가구들과 오브제들을 전형적이지 않게 배치한 관점의 차이는 우리가 ‘집’이라 부르는 공간을 무경계적으로 확장한다.


가장 최근에 지은 건물인 헤르조그 & 드 뫼롱의 작품, 비트라 하우스는 그중에서도 비트라 캠퍼스의 심장부라 할 만하다. 5층짜리 건물인데, 총 12개의 튜브를 다양한 방향으로 쌓아 올려 얼핏 보면 여러 개의 새장을 얹은 것처럼 보이는 이곳의 1층은 비트라의 모든 제품을 이용해 실제 주거 공간처럼 꾸민 일종의 쇼룸이다. 젊은 커플이 살 법한 로프트, 아기가 있는 가족들을 위한 아기자기한 아파트 등 그대로 내 집에 옮겨 두고픈 멋진 디스플레이는 가구를 사려는 이들에게 영감을 줄 뿐 아니라 실제로 주문까지 가능하다. 그 옆의 카페에선 아무리 기차 시간이 촉박해도 반드시 여유를 부리며 커피를 마시라 강권하고 싶다. 2층은 비트라 디자이너들과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 공간. 이곳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모든 사무 가구는 당연히 비트라 제품인데 희한한 해먹이나 미끄럼틀 같은 설치물로 비현실적으로 꾸민 사무실과는 달리,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모습이다. 사무용 의자는 모두 임스 와이어 체어고, 직원들이 매일 출퇴근하며 이용하는 버스정류장마저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했다니, 달리 먼 곳에서 영감의 원천을 찾을 이유가 없다. 이상적인 사무실을 찾는 ‘뷰티풀 워크 플레이스’ 캠페인 기획 취재를 해오며 나름대로 좋다는 사무실을 꽤 많이 다녀본 <엘르 데코> 팀이 가장 놀란 부분은 직원의 행복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한 작업 환경이다. 새로운 사무용 가구가 나오면 비트라 사무실에서 직접 가장 먼저 사용한 후 직원들의 냉혹한 피드백을 제품에 반영한다. 드넓은 개인 책상들 사이엔 너무 높아 위압적이지도 너무 낮아 서로 방해하지 않도록 적정 높이의 컬러플한 파티션이 자리 잡고 있다. 또 컨퍼런스나 회의는 반드시 캠퍼스 내 다른 건물에서 진행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직원들이 좀 더 많이 걷고 산책하며 일에서 빠져 나와 짧은 휴식이라도 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꿈 같은 환경은 공장으로 이어진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추가 근무나 교대 없이 돌아가는 공장. 전체 프로세스를 무제한으로 회전시키지 않고, 하루 딱 한 차례만 조립 공정을 지킨다. 축구장 두 개 만한 거대한 크기의 생산 라인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귀 따가운 기계 소리 대신 거대한 통창 밖의 새 소리에 귀 기울이며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어 공장이라기보단 고요한 성당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이곳을 둘러보면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이 왜 늘 비트라와 일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답을 단숨에 구할 수 있다. 개성 강한 (가끔은 유별나고 고집스런) 디자이너들이 지키고자 하는 자신들의 디자인 철학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비트라가 선택한 방식은 ‘여유’다. 작품 하나하나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배치한 공간에 대한 여유, 작업 공정을 무리하게 당기지 않는 시간에 대한 여유는 디자이너들이 요구하는 또 다른 어떤 것도 흔쾌히 수용한다는 뜻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사정에 치이지 않고 오직 디자인을 최우선으로 하는 다양한 가구들을 작품이 아닌 제품으로 구입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비트라의 알루미늄 체어를 만든 과정을 폴리(Paul Rhee)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그렸다.

Credit

  • writer 김이지은
  • editor 이경은
  • photographer Ferit Kuyas
  • digital designer 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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