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탕물과 부유물을 마주하고 나면 생기는 힘 #여자읽는여자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흙탕물과 부유물을 마주하고 나면 생기는 힘 #여자읽는여자

라효진 BY 라효진 2024.02.26
번아웃 이후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무던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산을 오르는 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지금 산을 잘 오르고 있는 걸까' 예민하게 의식하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산이 거기 있으니까 묵묵히 오르는 사람. 일단 산에 올라갔으니 그저 묵묵히 내려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호수처럼 잔잔하고 고요한 사람.
 
그래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글만 안 쓴 것이 아니다. 글쓰기의 재료가 되는 영화도 안 보고 책도 안 읽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 글이 쓰고 싶어질 테니까. 시간이 나면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무한 스크롤하고 지난해 입덕한 아이돌 영상을 나노 단위로 쪼개 봤다. 생계를 위한 글쓰기 이외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북토크에서는 여러분도 자신을 객관화하는 공적인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 코가 이만큼 길어져 있을 것 같았다.
 
글쓰기는 나와 타인과 세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정확하게 보고 구체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바닥까지 호수를 휘저어야 했다. 흙탕물과 부유물을 마주해야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글쓰기가 뭐라고. 첫 책을 내고 내 글이 얼마나 평범한지 인식하면서 글쓰기는 더욱 동력을 상실했다.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사놓고 몇 번이고 책장을 넘기다 덮다를 반복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내게 최은영 작가는 마음의 심연을 알아차리는 사람이다. 심연에는 아름답고 멋진 것만 존재하지 않는다. 추하고 잔인해서 외면하고 싶은 것들도 섞여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을 사랑하지만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는 것이 두려웠다. 호수를 휘젓고 싶지 않았다.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소설 ‘몫'에서 해진은 대학 교지 편집부에서 정윤과 희영을 만난다. 정윤은 한 학년 선배, 희영은 해진과 동기다. 해진은 정윤과 희영의 글을 읽으면서 “차마 질투조차 하지 못"하는, 절망감을 느낀다. “첫 문장을 쓰고 머뭇거리다 두 번째 문장을 쓰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정윤과 희영은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해진은 정윤과 희영을 동경하고 그들의 재능에 낙담하면서도 정윤과 희영 같은 사람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기사 아이템을 정하고, 취재를 하고, 써온 글을 합평하는 치열한 시간을 보내며 해진은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해진은 계속해서 새로운 글을 쓴다. 겁 많고 나약했던 해진에게는 글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해진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최은영 ‘몫' 중에서
 
소설에서는 교지 편집에 대한 편집 부원들의 논쟁과 신경전이 이어진다. 화자는 태풍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둘러싼 맥락을 세심히 관찰한다. 선악을 가르거나 타인을 심판하지 않고 너의 입장이 되어보았다가 나는 어디쯤 좌표를 두고 있는지 스스로를 객관화한다. 자기 안에 있는 모순과 한계를 아프지만 겸허히 인정하면서. 이러한 과정은 글쓰기와 닮아 있다.
 
 
소설집에서 ‘몫'과 함께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엄마를 대신해 엄마 역할을 해줬던 이모에 대한 단편 소설 ‘이모에게’다. 나와 너무나 닮아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복잡한 감정을 들게 하는 이모에 대해 서술하면서 화자는 말한다. “그 모든 평가와 판단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그것이 이모라는 사람의 진실에 가 닿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진실을 알고 싶은 진심이 절절히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우리는 나를, 타인을,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뿐이다. 삶에 대한 글을 쓸수록 내가 모르는 세계가 훨씬 많다는 것을 매번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글쓰기는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럽다. 최은영의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렇기에 글을 계속 쓰고 싶다고. 온실 속의 평온을 사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찬란함과 추악함을 직면하고 싶다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진실에 가닿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과연 내게 그럴 용기가 있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글쓰기를 통해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을 나도 조금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읽는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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