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룻밤을 보낼 것인가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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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룻밤을 보낼 것인가

‘숙소=호텔’ 공식은 이미 깨진 지 꽤 됐다. 여행에서 숙소를 잠만 잘 곳으로 생각했다면, 온전히 여행을 누리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LLE BY ELLE 2015.10.25



여행 갈 때 어디로 떠날 것인가는 서론이고, 어디서 잘 것인가는 결론이다. 좋은 곳에 좋은 사람과 간다 해도 숙소는 모든 것을 뛰어넘을 여행의 변수가 된다. 예전의 나는 무조건 싼 데서 잤다. 1원이라도 싼 게 중요했다. 예산이 조금 더 늘었을 땐, 가격대비 저렴한 곳, 이른바 가성비 좋은 곳을 찾았다. 나이가 조금 더 들면서는 동선을 너무 벗어나지 않도록 도심 호텔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후 호텔 선택 기준엔 새로 오픈한 곳인지, 조식이 맛있는지 등등 하나씩 조건이 추가됐고 내 여행 예산은 슬금슬금 비싸졌다. 


하지만 이런 럭셔리한 기준이 ‘올드’해지기 시작한 건 우리의 여행 예산이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아마도 2000년대 중반 즈음 ‘부티크 호텔’이라는 단어가 공공연히 쓰이기 시작하면서였던 것 같다. 규모(룸의 개수)가 작고, 컨셉추얼한 디자인과 인테리어로 방을 꾸미되 낭비에 가까울 정도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들은 배제했다. 음악, 방 안의 향기, 아니면 벽에 걸린 그림 같이 더 디테일한 것들을 챙기되, 되려 불편할 정도로 친절한 서비스나 24시간 룸 서비스 같은 것들은 사라진, 어떤 의미에선 호텔계의 대안이었다. 한편으론, 박제처럼 굳어 있는 비현실적 호텔 대신 좀 더 유니크한 내 취향을 존중받는다는, 더 인간적인 감정의 동요를 일으켜 주기도 했다. 한편, 여행지에서의 경험이 유명 유적지 앞에서 단체사진이나 찍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명소에 족적을 남기느냐에 관한 경쟁이 아님을 깨달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B&B(Bed&Breakfast)나 민박은 잠자는 곳마저 여행지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흡수해야 하는 것에 대한 답이었다. 


더 이상 B&B는 고급 호텔에 못 가는 사람이 싼 맛에 가는 곳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여행 온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부러 찾아가는 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 이후 우리는 에어비앤비(Airbnb)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일부러 꾸민’ 숙소 대신 진짜 남의 집으로 가서 자는 거다. 전 세계에서 자기 집 또는 방을 빌려줄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의 집에서 머무를 사람들에게 예약 서비스를 대행해 준 에어비앤비는 폭발적인 성공에 힘입어 출장 시에도 이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프로그램까지 오픈했다. 여행을 떠났을 때 그 지역에 사는 친구네 집에 며칠 얹혀 살아본 사람은 다들 안다. 단 2~3일을 있더라도 그렇게 보내고 나면 그 도시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보게 된다는 것을. 나 역시 수년 전, 런던에 사는 친구의 프랫을 찾아갔을 때, 아직 퇴근하지 못한 친구 대신 그 집 열쇠를 받아 혼자 지하철을 타고 도심 외곽 한적한 아파트로 걸어 들어가던 기분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동네 애들은 어떤 세발자전거를 타고, 어떤 빨래를 널어두고, 신발장은 얼만큼 정신 없었는지까지 생생하다. 









게다가 한국에선 2000년대와 함께 찾아온 국내 여행 붐이 다행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제주를 중심으로, 이젠 전국 어떤 소도시에서도 그 지역에서 제일 큰 관광호텔을 찾으려는 이는 없다. 대신 소박하지만 디자인이 예쁜 펜션들 혹은 수영장 펜션, 스파 펜션, 반려동물 동반 펜션 등 각자의 필요에 맞게 세분화된 곳들이 선택지를 채운다. 전국의 숙소들 중 기업이 운영하는 곳을 배제하고 좋은 곳을 큐레이팅해서 소개하는 웹진 ‘스테이폴리오’와 같은 서비스도 생겨났다. 우리가 찾고 있는 숙소는 이미 충분히 많아진 것을 넘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안타까움을 해소해 주는 환경까지 등장한 것이다. 


최근의 여행 트렌드에 대해선 고전적인 호텔 업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로 자구책을 찾고 있다. 세계적인 체인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좀 더 명확히 하고, 그에 맞는 여러 가지 이벤트와 프로모션을 기획한다. W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9월 동안 진행하는 ‘고메 쿠튀르’는 프랑스 W호텔에서 포맷을 가져왔다. 스타일리시한 호텔답게 패션과 접목했고, 패션을 음식과 함께 느끼고 감상하는 방식이되, 유명 디자이너 말고 영 크리에이터에게 기회를 준다. 올가을 고메 쿠튀르 파트너는 신인 디자이너 권문수. 이번 시즌 컬렉션의 대표 컬러와 디자인 컨셉트를 디자이너와 직접 상의해 음식에 반영했다. 단 각 룸마다 컨셉트를 다르게 한 형태의 호텔들도 이미 몇 해 전부터 종종 사용된 툴이다. 10월에 오픈할 호텔더디자이너스동대문 역시 룸마다 다른 디자이너 또는 셀러브리티가 디자인에 참여해 모든 룸이 다 다르게 생겼다. 중국 상하이에 3년 전 문을 연 스와치 아트 피스 호텔은 이름에서 예상했겠지만 스와치 그룹에서 운영하는데,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인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운영하며 아티스트가 꾸며놓은 작업실 그대로의 방을 일반 여행자에게 호텔 룸으로 투숙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지금의 숙소는 어디로 여행 갈 것인가, 예산에 맞는 잠잘 곳은 어디인가만 고민해서 될 일은 아닌 형국이다. 어떤 호텔을 고를 것인가, 다음 단계로 어떻게 생긴 방인지, 혹은 집주인이 누구인지까지 세세히 살피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숙소를 제대로 고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소 번거로운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애초에 뭔가 새롭고 흥미롭고 예측 불가능하고 기대되는 경험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숙소의 변화는 여행의 본질에 더 가까워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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